수업 그리고 두 번째 삶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할 날이 100일도 남지 않았다

by 차미레
돌아가는 길 위에서 알게 되었다.
수업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결국 나를 다시 묻는 질문이었다는 걸.
그렇다면, 나는 어떤 나로 그 문을 열게 될까.


학습연구년에 적응해갈수록, 학교 밖의 삶은 조금씩 나를 다른 형태로 빚어왔다.

수업을 하지 않아도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고,

교사라는 이름 뒤에 숨겨두었던 세계의 색깔들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하지만 달력의 숫자는 정직하다.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이고, 관계이고, 또다시 나를 흔들어댈 질문들이다.


‘수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다시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혹은 돌아가야만 하는가?’


학교는 내 첫 번째 삶이었다.

하지만 학교 밖에서 나는 또 다른 삶의 근육을 키워왔다.

그리고 지금, 두 개의 삶이 서로를 향해 천천히 수렴하고 있다.

100일 뒤, 나는 어떤 나로 교실 문을 열게 될까.


어쩌면 질문은 학교를 떠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들어가던 교실이 사라지자,

나에게 수업은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목소리가 생겼다.


- 수업은 가르침인가?

- 아니면 함께 살아보는 연습인가?

- 배움은 왜 교실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 교사인 ‘나’는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불편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학교에 있을 때는 너무 바빠서 묻지 못했던 질문들,

혹은 묻는 순간 무너질까 두려워 외면했던 질문들이었다.


교실을 떠나니 배움도 멀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배움은 교실보다 더 많은 곳에 있었다.


책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내 감정의 미세한 떨림 속에서.


그제야 알았다.

내가 했던 수업은 지식을 전한 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조율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러자 또 다른 질문이 찾아왔다.

그 온도를 나는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예전처럼 버티며가 아니라, 나답게?


100일 뒤, 교실 문을 열면

아이들은 어떤 얼굴로 나를 맞이할까.

나는 어떤 눈빛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게 될까.


- 이전의 나처럼 ‘해야 하는 수업’을 하게 될까

- 아니면 두 번째 삶에서 배운 감각으로 ‘하고 싶은 수업’을 만들게 될까

- 그 경계는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부딪힐까


아마 그 답은 복귀하는 날,

첫 호흡, 첫 시선, 첫 질문에서 드러날 것이다.


나는 지금도 배움의 의미를 다시 쓰는 중이다.

학교는 첫 번째 삶이었고,

학교 밖은 두 번째 삶이었다.

그리고 이제, 두 삶이 충돌하거나, 혹은 서서히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새로운 나로 계속 살아가겠다는 다짐일까?


100일 뒤의 나는, 그 질문을 품은 채 교실 문을 열 것이다.

그 문 너머에서,

내 두 번째 삶의 첫 수업이 시작될 것이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