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가 아닌 동의를 묻다

존 벅의 『소시오크라시』를 교실에 옮기다

by 차미레
침묵은 동의가 아니다.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괜찮다고 여겨졌던 순간들.
그 사실을,
이제는 말해야 한다.


소시오크라시는 합의를 다르게 설명한다.


소시오크라시(sociocracy)는

각 집단이 지식을 공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공동으로 자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조직개발 이론이다.

구성원은 단순한 소속원이 아니라

함께 방향을 잡는 동반자다.


그 안에서 말하는 ‘동의(consent)’는

호불호에 따른 찬성이 아니다.

좋아서 하는 선택이 아니라,

집단의 공동 목표에 비추어

“이 제안이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판단하는 승인이다.


완벽한 대안을 찾을 때까지

끝없는 토론을 이어가기보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직의 목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상태에서

제안에 대한 ‘동의 여부’를 확인한다.


합의는 설득의 결과가 아니라

공동 목적을 공유한 사람들의 책임 있는 판단이 된다.


또한 소시오크라시는

조직을 ‘운영한다’고 하지 않고

‘조향(steering)한다’고 표현한다.


힘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 않는다.

수평적으로도, 수직적으로도 순환한다.

조직은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방향을 잡아가는 구조다.


이 지점에서 나는 멈춰 서게 되었다.


학교는 철저한 위계 구조로 움직인다.

교장–교감–교사,

그리고 교사–학생.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결정하는 자와 따르는 자.

우리는 그 구조를 너무 오래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소시오크라시는 기업 조직을 위해 발전해 온 이론이지만,

나는 이 구조를 학교에 옮겨보고 싶어졌다.


학교를 완전히 수평적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계 속에서도

존엄은 평등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처럼

사람을 보고 업무를 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 조직이 굴러가기 위해 어떤 역할이 필요한가”를 먼저 묻고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호감이 아니라 기능을 기준으로,

직위가 아니라 책임을 기준으로.


나는 교실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아이들이 반대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동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정말 괜찮았던 걸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고 싶었던 걸까.


진정한 합의란

모두가 찬성하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 상태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나는 권위를 내려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권위가 멈추지 않고 흐르도록 만들고 싶을 뿐이다.


학교는 위계로 유지된다.

그러나 교실은

위계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살아난다.


그래서 나는

그 동의를 묻는 교사가 되려 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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