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빨레 드 고몽(Palais de Gaumont)을 찾아왔다. 불란서식 레스토랑이다. 빨레 드 고몽, 불어에는 이상하게도 철학보다는 샹송과 요리 냄새가 난다. 토요일 오전 일과를 마치고 우리 부부는 마치 서울로 선보러 가는 기분이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있는 폼을 다 내려고 집에 있는 진주는 다 동원한 것 같다. 귀에서 목으로, 또 손가락까지. 나도 랄프 로렌 양복에다가 뭔가 액센트를 주자고 보우 타이를 매었다. 내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일년 전에 아내가 여행 중에 나의 부탁으로 핀란드에서 산 것이다. 막상 보우 타이를 매려고 하니 그게 잘 되지를 않았다. 괜히 제발이 저리다고 왠지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 볼 것 같았다. 실제로 매고 서울 거리를 활보하니 누구하나 눈길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가 책임지는 것이다. 내 목에 두른 보우 타이 보듯이 그들에게는 내 인생이 별 상관이 없다. 모두가 각자 살아가면 된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 인생을 지레 겁 먹고 사는 것은 아닐까?
작은 아들이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픽업하여 데려다 준 곳, 빨레 드 고몽의 위치는 나의 상상과는 달랐다. 청담동 대로변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에 오래된 집 같아 보였다. 담쟁이가 덮힌 정문 위의 벽에 조그만 대리석 같은 데에다 가게 이름이 새겨 있었다. 그것도 주의해 보아야 겨우 식별할 정도다. 첫 인상부터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다. 지배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그거야 음식점에서 언제나 있는 상투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안내한 자리에 앉으니 이제야 주위의 정경이 보인다. 앞에는 낡은 영어책들이―혹은 그 속에 불어책도 있었을른지도 모르지만―앞에 장식으로 죽 놓여 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인테리어 감각 같다. 위를 쳐다 보니 통유리로 하늘이 트였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실내의 조명들이 반사되어 별처럼 보인다. 바깥의 담쟁이와 함께 연출하는 분위기가 환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그다지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교묘하게 칸막이를 하여서 옆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고 말 소리도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서빙하는 친구가 와서 미리 주문한 대로 음식을 내오겠다며 아들들이 시켜 놓은 독일산 화이트 와인(Robert Weil)을 맛보라고 글라스에 조금 따라 준다. 익숙치 않은 모습이지만 맛을 본다. 연한 갈색으로 시면서도 달콤하며 시원하다. 애퍼타이저로 일곱 가지 가량이 나온 것 같다. 음식의 양이 전부 엄지손가락만 하다.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원 소꼽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옆 사람이 듣지 않도록 우리끼리 하는 소리다. 들키면 우리의 교양이 ‘뽀롱‘이 나므로. 맛은 이제까지 정말 먹어보지 못한 맛들이었다. 음식을 감식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맛에 황홀해 하기보다는 새로운 맛에 그저 신기해 하는 초등학생 같다고나 할까. 아내도 상기된 표정으로 연신 맛을 보며 거기에 맞는 느낌을 표출해 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다. 메인 디시인 스테이크는 솔직히 말해 지난 여름 아틀란타로 큰아들 집에 갔을 때 데스틴(Destin)에서 육즙이 뚝뚝 듣는 스테이크를 큰아들이 구워 준 것만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나온 디저트 세 가지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정말 맛있다라는 말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특히 한 종류는 약간 시큼하면서도 시원하여 이제껏 먹었던 느끼한 맛을 한방에 날려 보냈다. 시간은 여섯 시에서 시작하여 어느덧 아홉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들 둘이 어머니 환갑 생일을 자기들 나름으로는 좀 더 뜻있게 보내드리겠다고 하는 전략으로 선택한 곳이 이곳이었다. 결혼한 지가 5월이면 36년 째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참으로 대과없이 지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번지르르하게 내세울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 쑨 인생도 아니었다. 그래도 가끔은 이보다 더 나았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못 잡은 걸 후회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 아내의 모습은 처음 선 보았을 때는 조금은 ‘새침떼기’ 같았다. 살면서 요즘도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겉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관대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와 비교해서 그렇다. 나는 한 번 ‘꽁’하면 잘 풀리지 않는 편인데 아내는 그럴 것 같지 않은데 푸는 편이다. 어느 부몬들 자식에게 자비롭지 않겠는가마는 나는 그런 것에 비하면 인자함이 덜한지 장가간 아들에게 저렇게 할 것까지 있는가 싶은데 온갖 ‘수발’을 다 든다. 장가 가기 전까지는 장가만 가면 한시름 놓을 것 같았지만 천만에 말씀, 여전히 뒷바라지해야 하니 부모 노릇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사실은 빨레 드 고몽이란 곳으로 아들들이 예약을 한 달전부터 하면서 나는 마치 애인에게 프로포즈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 무언가 분위기를 빙자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내에게 하리라고 별러왔었다. 드디어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저어… 할 말이 있는데…….” 이럴 때는 ‘여보’라는 말을 정겹게 써야 하는데 나는 이때까지 결혼하여 ‘여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 말을 하면 도저히 낯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뭐예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다. 왜냐하면 내게서 별로 심각한 말이 나올 게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심하여 말을 꺼냈다. 첫 실마리를 잘 풀어야 이야기가 스므스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오늘 저 통유리 속을 통하여 비추어 오는 조명에 어쩌면 이성이 약간은 흩으러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내가 그것을 겨냥하고 왔지만.
“내가 지난 2년간 부산선교훈련원에 다닌 것 알잖아. 물론 당신도 같이 다녔지만. 그것은 내가 정년 퇴임에 해당되는 해에 의료선교를 나가려고 한 것이었어. 지난 번에 내가 그런 뜻을 언뜻 비치니까 당신은 아직은 아니라고 완곡히 거절하였지. 나도 당신의 동의없이 진행할 용기는 없소. 단지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걸 오늘 다시 말하고 싶을 뿐이야.”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했다. 아내는 순간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대의명분을 단칼에 자르기에는 그도 마음이 그렇게 칼로 무자르듯이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그 결과는 예상하고 있기에 여기서 다른 화제로 옮겨 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당신의 뜻을 알겠어요.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그것은 그때 가서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이 정도면 나의 작전은 성공이다.
“실은 내가 몇 년 전부터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가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소. 프랑스 국경 생장 피에드포르를 출발해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20킬로를 걷는 길이지.” 내가 말을 시작하기가 무색하게 아내가 말하였다. “갔다와요.” 너무 빠른 대답에 환호와 함께 놀라움이 앞섰다. “이런 반응이 아닐텐데 왜 이렇게 되었지?“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내의 기분을 살폈다. ”그런데 저와 같이 가면 안 돼요?“ ”아니 이것은 무슨 시나리오에도 없는 소리지” 혼자 말을 중얼거리면서 약간은 당혹해졌다. “내가 뭐 혼자서 관광 가려는 게 아니라는 걸 당신이 잘 알잖소. 나는 혼자 걸으면서 나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소. 하나님과 나의 관계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니까. 노트를 갖고 가서 뭔가 건져오고 싶소.” “아니 딴 게 아니고 거기에는 한국 사람도 많다고 하는데… 놀러온 여자들과 ‘삼싱’이…….” “아니 뭐라고요? 햐 여자들의 남자에 대한 감각이란 당신도 어쩔 수가 없구려. 하긴 그런 것을 어쩌면 전혀 부인하지도 못하겠지만. 하지만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쨌든 아내가 흔쾌히 승낙을 하였다. 내년이나 내후년을 목표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마지막 히든 카드를 꺼낼 차례다. 이때는 접촉점을 이용해야 한다. “김탁환이란 작가가 있는데 이 사람의 아내가 진주 사람이래.” “그래요?” 반응이 온다. “이 사람도 부모가 평안도 사람인데 피난 왔다고 하더군. 그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인 것 같애. 아마도 그 나이라면 권사쯤 안 되었겠어. 이 사람이 S대학 나오고 처음에는 비평을 하다가 카이스트 대학교수도 집어치우고 전업 작가를 시작했다는 거야. 왜 텔레비전에 나온 '불멸의 이순신'인가 하는 드라마도 이분이 썼다고 하더군.” “그래요?” “음, 근데 이 사람이 정말 성실하더라고. 하루에 10시간씩 글을 쓴대. 엄청나지. 집필실을 파주인지 대전인지 보여주는데 부럽더라고. 오직 글 쓰는데 필요한 책과 컴퓨터만 있는 자기만의 공간! 나도 그런 공간을 가졌으면 했지.” “왜 당신도 그러면 삼천포 같은데 바다가 보이는 곳에 원룸을 얻어놓고 전업작가처럼 쓰면 되잖아요.” 응 이것은 너무 진도가 나간 게 아닌가? “사실 그래 주면 나야 좋지. 글재주는 없지만 내 여생을 글 쓰는 일에 나의 힘을 쏟는다면야 내게는 그것 또한 행복이 아니겠소.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니 고맙소만은 내가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지 별 것은 아니오.” 이쯤에서는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너무 밀고 들어가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는 케익이 나왔다. 사람 많은 데서 ‘해피 버스데이’하면서 손뼉치고 노래를 부를 수 없고 조용히 촛불을 껐다. 삼십 육년 동안 나를 믿고 따라와 준 그녀가 고맙고 내 마음이 뿌듯해진다. 담쟁이 너머의 공간과는 격리된 동화의 나라에 온 것이 백번 생각해도 잘 된 일이다. 두 당 이렇게 고액을 치른 적이 없는 이 시공간을 이제는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행복이란 단어가 촌스러워 보이지만 유치환의 시 「행복」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