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한 듯, 만족한 듯, 풀려난 듯, 말로 어려운 종결감을 느낀다’
대학교 때 시를 끄적이다가 졸업하고서는 먹고사는 데 바뻤습니다. 2001년이 되어서야 인터넷으로 시를 배우면서 그저 저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시적인 분위기를 내며, 읽어서 그런대로 시의 모양이 갖춰지면 한 편의 시가 되었구나 하면서 지내온 세월이 그럭저럭 50년, 반 세기가 된 것 같습니다.
시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사실만 제시하고서도 전체가 시적 울림을 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관념어를 사용하여 구성하는 해석적 시도 있을 수 있고, 풍자를 주로 하는 시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은유(metaphore)야 말로 시적 기술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은유는 ‘일종의 수사법으로 두 개의 사물이나 관념 간의 유비로 구성된다’고 정의하지만 은유는 문학의 기본인 상상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은유를 하자면 두 개의 사물이나 관념을 잇기 위해서는 상상이 작동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고 저 같은 사람은 많은 노력을 해도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둔재도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여 그것을 이미지화하여 어떤 관념이나 의미 혹은 정서로 연결하기 위해, 은유를 작동하여 나타내자고 마음먹고 제가 옛날에 써놓았던 시들을 이 잣대를 가지고 고쳐쓰기를 하다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마음에 드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티비나 영화를 보면 문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원고지 앞에서 글을 쓰고는 원고지를 주먹에 넣고 짓이겨서 쓰레기통에 수북이 쳐넣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한숨을 쉬면서 낙담하는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습니다.
근자에 신문의 신춘문예 공모 등에 시와 수필을 수 편 응모했지만 다 낙선했습니다.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의 능력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실제로 글을 쓰면서 멈추는 자신을 보며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하는 회의와 좌절감도 깊숙이 느껴져 옵니다. 단지 쓰고 저 혼자 잘 되었다고 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인지, 남들이 무슨 시인님하고 불러주는 호칭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인지, 저를 누군가 알아준다는 허명에 목을 매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한때는 박이문 교수가 쓴 글 중에서 시는 과학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다는 말에 동감한 적이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감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진정한 사물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시는 이미지를 통해서 혹은 비유를 통해서 세상의 진정한 모습은 추구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습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서 전문가의 레벨에 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이 쓰는 시에 대한 자부심도 없고, 도대체 이런 상황에 있으면서 시를 쓴다는 것이 제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김우창 교수의 「시•현실•행복」(『지상의 척도』)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 생각에는 시는 행복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시를 쓴다? 얼마나 바람직한 발상입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시를 쓰는 보람을 느끼게 되고 어쩌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느끼면서 한평생을 유유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시를 쓰면서 한 번도 제가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겨우 쾌감을 갖거나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대로 좋은 표현, 즉 비유일 때 혼자서 좋아서 흐뭇해 하는 정도입니다. 이것이 행복일까요.
행복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식욕, 성욕. 지력 등의 욕망의 충족에서 출발합니다. 더 나아가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은 돈과 권력과 명성과 건강입니다. 현자들은 이들을 속물이라고 타기하라고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욕망의 대상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잘만하면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도 같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단지 본능적으로 그것과는 다른 시적 욕망의 대상이 있었기에 그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진리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시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시를 써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창조했다는 만족감인가? 여러 가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우창 교수는 엘리엇의 ‘시적 충동’과 발레리의 ‘의지의 정지’ 하이데거의 ‘사물에의 열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 엘리엇이 시적 충동이 표현되었을 때 비로소 ‘소진한 듯, 만족한 듯, 풀려난 듯, 말로 어려운 종결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발레리도 시적 창조 결과가 의지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어려운 말을 합니다. 하지만 둘은 시적 과정이 기쁨의 근원이 된다는 것에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탁월한 시의 창작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 같은 무지렁이 시인들에게 한 줄기 빛을 선사합니다. ‘시적 충동과 그 충족의 과정은 바로 우리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욕망과 그 충족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곧 행복의 모습이 아니겠는가?’라고 김우창 교수는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행복의 요체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잘 쓰고 못 쓰고는 그 다음의 문제이고 누가 이 과정에 성실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행복을 향유하는가가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고를 더 넓히면 인생사 모든 분야에 적용됩니다. 학문을 하든, 장사를 하든, 운동선수를 하든, 음악을 하든, 어느 곳에나 뛰어난 사람이 있고 열등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직 일등만을 지독히도 찬양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욕망의 결과물보다는 그 충족의 과정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후진’ 인생에게도 희망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대장간의 대장장이는 화로에 쇠(소재, 사물, 시적 충동)를 달구고 두드려서(발견과 표현, 상상, 충족의 과정) 식칼(시 한편)을 만들어 냅니다. 대장장이가 자신이 만든 식칼에 흡족해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행복은 오히려 ‘달구고 두드린’ 집중과 성실과 땀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조해진 저의 기분을 달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인물 좋은 소나무 밑에 있는 조촐한 달개비꽃 하나도 그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