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과 내용
일본 스모의 1월에 열리는 하츠바쇼(初場所)에서 어제 세키와케(関脇) 미타케우미(御嶽海)가 13승 2패로 요코즈나(橫綱) 테루노후지(照ノ富士)를 이겨서 통산 세 번째 우승을 했습니다. 미타게우미는 필리핀 사람과 일본 사람의 혼혈아로 알고 있습니다.
1992년 경부터 일본 스모를 보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의 30년이 되는군요. 당시에는 한국 사람도 한두 명 보였는데 그후에는 전혀 볼 수가 없고 여전히 몽골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판을 치고 있습니다. 스모의 최고 높은 자리인 요코즈나를 그들이 거의 휩쓸고 있습니다. 그 동안 보았던 요코즈나로는 아사쇼류(朝靑龍), 하쿠호(白鵬), 기세노사토(稀勢の里), 가쿠류(鶴龍). 하루마후지(日馬富士) 등이 있고 요즘은 테루노후지(照ノ富士)가 판을 휘어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하쿠호(白鵬)는 작년에 은퇴하였으나 45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세노사토 빼고는 모두 몽골 사람입니다.
제가 씨름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니까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닙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아는 것만 말해보려고 합니다. 한국 씨름은 모래판 위에서 서로 상대편의 샅바를 잡고 시작합니다. 그 상태에서 손 기술, 다리 기술이나 허리 기술 등으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경기입니다.
일본은 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상대와 맞붙어 지름 4.6m의 씨름판(土俵/도효) 밖으로 상대를 밀어내거나 기술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제일 많이 하는 기술이 ‘요리키리’(상대를 손으로 밀어붙여 저절로 발이 씨름판 밖으로 나가게 하는 기술) 같았습니다. 제가 스모를 처음에 보면서 놀란 것은 100킬로도 훨씬 넘는 체구로 개시선에서 돌진하여 서로 머리가 쾅 부딪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 머리가 성할까 하는 염려가 들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신성한 스모를 하면서 처음에 맞붙을 때 서로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치사스러운데도 정당한 공격 방법으로 인정된다니 도리가 없는 노릇입니다.
한국 씨름과 다른 점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역사(力士)들의 전적에 의해 계급이 매겨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위로부터 요코즈나(横綱), 오제키(大関), 세키와케(関脇), 고무스비(小結), 그 다음에는 마에가시라(前頭) 1부터 15까지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스모를 보면서는 지루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그냥 인사를 했으면 곧바로 붙어서 승부를 내면 될 것을 웬놈의 준비 과정이 많은지, 붙지는 않고 왔다갔다 하는데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곧바로 붙지 않고 어떤 형식을 쌓아가는 가운데 긴장이 점점 고조된다는 것을 세월이 많이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자신의 대기석에서 개시선 까지 세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합니다. 그때마다 손에 소금을 쥐고 ‘도효’에 뿌립니다. 아마 부정을 물리치는 샤마니즘의 풍속의 잔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심판원의 복장은 그냥 통상복이 아니라 정교한 예복의 수준입니다. ‘도효’ 근처에서 서빙하는 사람들도 일정한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데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기계적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저는 형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승부를 내기 전에 철저한 형식을 통해서 내용을 도출해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한국 씨름을 형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일단 샅바를 잡고 우수한 기량을 보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과정이나 형식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내용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제가 스모를 나름 오래 보면서 느낀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누가 이기든 결코 이겼다고 양팔을 하늘로 번쩍 들고 환호작약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표정하게 걸어나갑니다. 이것도 처음에 볼 때는 정말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이겼으면 자신의 기쁜 감정을 표현해야지 저렇게 뚱하게 걸어나가는 게 무슨 뜻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패자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른 하나는 씨름판에서도 인성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스모는 시합이 끝나면 패자는 서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인사하고 나갑니다. 이때 미묘하지만 인간의 성격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선수는 졌는데도 정말 고개를 푹 숙이고 공손히 인사를 하는가 하면 어떤 선수는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하고 씩 나가버립니다.
요코즈나 하쿠호는 최고의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서 최고위 역사로서의 품위가 없어보였습니다. 시합을 해도 ‘도효’ 선 밖으로 나가서 이미 졌는데도 그렇게 극렬하게 밀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는 여지없이 밀어버려 상대가 나둥그러지게 합니다. 그에게는 대인으로서의 관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반면에 이번에 우승한 미타케우미(御嶽海)는 상대가 선 밖으로 나가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몸을 잡아줍니다. 어쩌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항상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하쿠호는 전체적으로 하는 행동이 품위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도 양심은 있었든지 어떤 시합의 마지막 날 아나운서가 요코즈나의 품위에 대해서 말하니까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못하더군요. 그만한 재력과 능력을 가지고 그러한 포용의 여유가 안 생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는 행동이 꼭 마에가시라(前頭) 급이었습니다.
스모와 씨름은 비슷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많이 다릅니다. 그 다른 점을 저는 ‘형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결코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우열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본 스모는 두 달마다 열리는데 이번에는 하루바쇼(春場所)라고 해서 3월에 오사카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역시 관심은 테루노후지가 다시 우승할 것인가 여부입니다. 벌써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