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해 4월부터 손주들에게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번 달에 열한 번째의 편지를 썼습니다. 내용은 주로 제가 살아온 모습 혹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것들을 전하였습니다. 큰 손자가 이제 중학생이 되려고 하면서 제 학창시절을 뒤돌아보게 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나지만 하나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학창시절 아니 더 나아가서 제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 소중하다고 믿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건대 결코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성공적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비참한 몰골이라고 스스로 비하할 정도는 아니고 공평하게 말한다면 그저 그런 수준, 혹은 어정쩡한 상태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앞을 쳐다 보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입니다.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는 경산(絅山,끌어죌 경이라고 하니 호도 긴장감이 도네요) 정진규 선생님이 저보다 딱 열 살이 많은데 78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느낌을 갖습니다. 제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나서 제 손주들이 혹은 친구들이 ‘그의 인생의 전반중반은 별로 볼 게 없어도 후반은 그래도 뭔가 하나에 집중하고 성실하게 살다갔다‘라는 말이라도 듣고 가면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때는 이미 제가 땅속에 있으니까 그런 것을 지각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입니다. 아니 그런 가정이 가능하다고 미리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갖고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에릭 캔델은 평생 바다달팽이라는 연체동물을 가지고 기억에 대해서 집중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묘하게도 그는 저보다 딱 20년 먼저 태어났군요. 그와 비교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만, 저도 남은 인생을 무언가 집중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마음은 이렇게 굴뚝 같지만 당장 이런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중고학창시절이라면 인간의 육신의 본능에 의해 남학생은 여학생에 호기심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불온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고 나름 정당성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다 지나서 돌아보면 역시 그때는 자제를 해야 옳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저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마침 이승하 교수의 『시 어떻게 쓸 것인가』를 보니 책을 읽을 시간을 확보하려면 웹서핑, 카톡하는 것, 게임, 텔레비전 시청, 스포츠 경기 관람, 영화보기, 음악감상, 등산 친구와의 만남, 맛있는 것 먹기, 등등을 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작심삼일이라고 너무도 많이 실패해서 말을 꺼내기가 겸연쩍고 무섭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넘어야 할 산이고 또 이렇게 해야 저의 삶의 형식이 바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절대절명입니다. 중고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목표를 세우고 집중하겠다고 누구나 다 결심하고 실행하지만 결국 성공여부는 얼마나 자신의 집중을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술 마시러 다니고 연애질하고 언제 공부하겠습니까. 자제를 하고 한 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에게 후회되는 것 중 하나는 진정으로 제 인생을 던져버릴 정도의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저 우연에 의해 해후할 수도 있지만 저 스스로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노력하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치명적입니다. 환산(還山)스님이 송담(松潭) 스님을 보고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듯이 말입니다. 그런 스승을 만났다면 훨씬 더 용이하게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제가 손주에게 사표는 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는 말년에 무언가 하나에 집중하여 성실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인정해 준다면 그 외에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 평생에 모은 재산도 변변치 않으니 물려줄 유산도 없다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정신적인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앞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서재에 있는 책을 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책은 사다놓고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습니다. 특히 시집들을 보면 죄책감이 들 정도입니다. 끊임없이 읽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쓴다면 그것으로 제가 할 일을 다 하는 셈입니다. 운이 좋으면 혹시 몇 권의 책으로 제 생각을 남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다지 집착할 일도 아닙니다.
검도에는 애증이 엇갈립니다. 우선 나이 탓도 있고 허리가 받쳐주지 못해 20년 이상 해온 이 검도를 그만 두느냐 마느냐를 두고 오래 고민해 왔습니다. 이제 돌아서면 그뿐일 텐데 무언가 아쉬워서 그래도 조금은 꼬투리를 잡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근자에 읽은 오모리엔 마사오(小森園正雄) 범사 9단의 책에서 저에게는 귀중한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검도를 하는 사람은 유효타돌을 얻기 위해 기술에 집착하고 그것을 발전시킬 방도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하지만 오모리엔(小森園) 범사는 말합니다. “기술은 기(氣)의 검도를 하기 위한 수단이다.” 말하자면 검도 수련의 목표는 기술이 아니라 기의 단련이라는 것입니다. 기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속이 깊은 바다속이라면 바다의 표면에서 반짝이는 그 무엇이 기이다라고 한 것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습니다. 기회가 허락된다면 저의 검도관을 바꾸고 승단에의 집념도 내려놓고 오직 기의 검도에 정진해보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마지막을 고하는 날 손주들의 얼굴을 보고 제 인생의 후반에 제 나름으로 집중하여 성실하게 보냈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제가 태어난 지복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