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에서 향기가 풍겨야 수필의 꽃이 필 수 있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 피천득의 「수필」에 나오는 서두입니다. 이 문장들은 기억에도 새롭습니다. 고등학교 국어 책에서 보았고 국어 시험에도 나왔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한국 수필계의 대표적 인물이고 대가이며 이제는 거의 전설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남긴 작품이 정목일 선생에 의하면 고작 78편(이 책에는 83편이 실려 있습니다만)이라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정목일 선생은 피천득 선생이 50대에 수필을 절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나은 수필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2007년에 돌아가셨으니 97세를 사셨습니다. 거의 인생 후반 50년을 수필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떨어져도 인생의 지혜는 밝아지는 법입니다. 수필이라는 글 자체가 인생의 깨달음에 대한 글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을 읽기 전에는 이분의 대부분의 수필이 「수필」과 같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수필」과 같은 문체의 작품으로는 「오월」뿐이었습니다. 두 작품의 특징은 ‘메타포’로 가득차 있습니다. 시적 수필이라고 할 수 있고 또는 산문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작품은 문체상으로 그의 수필 중에서 예외적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소박하고 간결하게 진술하는 문체라고 저는 보았습니다.
피천득 선생의 대표작으로는 「수필」 「오월」 「인연」을 듭니다. 「인연」에서 그는 아사코(朝子)가 소녀, 숙녀, 부인이 될 때마다 만난 세 번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움을 가졌지만 다른 이의 부인이 된 그녀의 모습을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라고 말하면서 세 번째의 인연을 후회할 때는 애잔한 여운마저 남습니다. 얄궂게도 이 작품이 그의 사후에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밝혀졌다니 약간은 허탈하기도 합니다.
저는 수잔 티베르기앵과 정목일 선생의 책을 읽고 저 나름으로 수필의 체크리스트 다섯 가지를 정했습니다. 첫째는 경험입니다. 살면서 자신이 겪은 체험이 소재가 됩니다. 사실이지 허구가 아닙니다. 둘째는 구성으로서, 수필이니까 논리적이기보다는 대부분은 붓가는 대로 쓰지만 그래도 주제에 맞게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문체로서, 저 개인적으로는 ‘메타포’가 많은 문장을 좋아합니다. 넷째는―여기가 중요합니다만―자신이 겪은 체험 가운데서 관점, 의미부여, 통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 안 되면 ‘단순한 체험의 기록’으로 되기 쉽습니다. 다섯째는 서두와 결말로서, 서두는 호기심을 일으킬 수 있는 문장, 결말은 닫힌 결말이 아니라 열린 결말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연』을 읽으면서 어떤 관점을 보이지 않고 단순히 ‘체험의 기록물’ 같은 글들도 있어 조금은 실망이 들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외삼촌 할아버지」 같은 작품은 개인적인 외삼촌 할아버지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거기서 무슨 인생의 깨달음, 관점, 의미부여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대가이라도 모든 작품이 뛰어날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정목일 선생은 피천득 선생과 개인적인 인연도 있고 또 그의 글에서 보면 거의 사부로 모시고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책 『수필과 산책』에서 피천득 선생의 문장의 특성을 다섯 가지 들고 있습니다. 첫째 시적인 문장, 둘째 서정적인 문장, 셋째 고결한 인품이 담긴 문장, 넷째 순수하고 투명한 동심의 문장, 다섯째 여성적이며 유미적인 문장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동의하지만 첫째 ‘시적인 문장’이라는 부분에서는 조금은 머리가 갸웃해집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작품 중 「수필」과 「오월」은 시적 문장이라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그 외의 대부분 작품은 특별히 수사적 기교를 부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책 말미에 있는 박준 시인도 피천득 선생의 문장이 ‘소박’하다고 했고, 박완서 소설가도 ‘담백’하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특히 아이들을 좋아해서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순수하고 투명한 동심의 문장’이란 평가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소설가 김훈의 수필집 『라면을 끓이며』가 생각났습니다. 김훈 선생이 남성적 문장이라면 피천득 선생은 여성적 문장이라고 봅니다. 김훈 선생의 글을 보면 ‘메타포’가 많고 글을 읽으면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으면 무언가 서정성이 배어나옵니다. 심하게 말하면 ‘센티멘탈’한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김훈 선생은 「광야를 달리는 말」에서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회상하며 이렇게 씁니다. ‘내 아버지의 삶의 파탄과 광기, 그 꿈과 울분과 절망의 하중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는 비명을 지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건너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반면에 피천득 선생은 「서영이」에서 딸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걷고 싶다.’라고. 지금 나에게 이 축복받은 겨울이 있다. .. 그리고 다행히 내가 오래 살면 서영이 집 근처에서 살겠다. 아이 둘이 날마다 놀러올 것이다. 나는 「파랑새」 이야기도 하여 주고 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줄 것이다.‘
정목일 선생은 피천득 선생의 삶의 모습을 『수필과 산책』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장식품도 장서도 별로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커피와 술은 못했습니다. 문학단체에 속하지도 않았고 심사위원도 고사했다고 합니다. 박완서 소설가도 피천득 선생의 집을 방문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필요한 겉치레가 아무것도 없는 썰렁한 집이었다. 서재만 아기자기했지만 서재라 부르기엔 책이 너무 없었다.‘
제가 피천득 선생의 『인연』을 거의 다 읽어갈 때 쯤 저도 모르게 ’아, 수필이란 쓰는 이의 인품을 말한다고 했는데 이걸 말하나‘하고 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정목일 선생은 『수필과 산책』에서 ’인격에서 향기가 풍겨야 수필의 꽃이 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때는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시인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의 인품이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노벨상 받은 네루다 파블로는 여성 문제 등 문제가 많았지만 시를 보면 역시 탁월하였습니다. 그런데 수필은 어떻게 그가 쓴 글을 보고 그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그의 인품이 전하여져 왔습니다. 그 논거를 대라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경험한 사실들, 생사를 가르는 난관에 처했을 때의 처신, 혹은 이해관계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피천득 선생의 글에서는 그가 경험한 사실 외에는 없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분에게는 사(邪)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목일 선생이 그렇게 부르짖던 ’좋은 인품이 좋은 수필을 낳는다‘는 그 말이 실감나는 『인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