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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목 Feb 26. 2022

『공부하는 삶』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책을 많이 읽지 마라’

  ‘공부하는 삶’이란 제목에 끌리어 사서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책이 나온 연도를 보니 1920년, 즉 백 년전에 발행되었습니다. 저자는 신부이면서 파리 가톨릭대학 철학교수를 지냈습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전공한 모양인데 그래서 그런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의 신적인 존재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책을 읽어 가다 보면 지금 현실하고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논리의 전개도 비약이 많고 아포리즘(aphorism)적인 말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라‘, ’~하지 마라‘는 식의 말이 많다 보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것이 많이 보였습니다.


  내용이 방대하다 보니 세세히 언급하는 것은 무리한 것 같애 제게 심정적으로 와닿는 부분만 살펴봅니다.

  첫째, 책에 처음 언급되는 것이 소명(召命)입니다. 소명이란 영어로 calling이라고 합니다. 소명의 뜻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예가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은 대개 하나님이 목사의 일을 하도록 자신을 불렀다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학문을 한다면 이것은 내가 마음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학문의 일을 하도록 불렀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결단하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학문을 하라고 명한 것이라면 스스로 대의명분도 가질 수가 있고 설사 어려움이 있어도 더 큰 분에게 의지하여 분발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길을 가는데 묵묵히 흔들림없이 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르티양주는 ‘공부하는 삶은 금욕과 의무를 요구한다고 하며 가장 소중한 것은 의지, 깊게 뿌리박힌 의지’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되고 무언가를 성취하겠다는 의지’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 소명 의식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한 길을 나아야 합니다. 목표는 대충 세워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학과는 제가 잘 모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예를 들어 의학이라면 그냥 나는 의사가 되어야지 하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임상 의사라면 내과, 그것도 심장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되리라 한다든지, 의학이라면 병리학 혹은 생리학을 전공하리라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는 거북이 걸음이라도 꾸준히 걸어야 합니다. 마침 제가 처음 의과대학을 갔을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이름은 잊었는데 이 친구는 정말 별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강의실의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등수도 없었다. 이 친구가 졸업할 때 성적이 우수했습니다. 그는 ‘꾸준히’ 6년간을 한결같이 공부를 한 것입니다. 바로 학문을 하는 자세는 이래야 된다는 걸 인생 거의 다 살고 나서 깨닫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재앙은 방 안에 조용히 머무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의자에 얼마나 오랫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있느냐에 성패가 달린다는 것입니다.


  셋째,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영어로 concentrate라고 합니다. 어원 사전을 보니 “to bring or come to a common center”로 되어 있습니다. 즉 ‘공동의 중심으로 가져오거나 오다‘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렌즈로 포커스를 맞추어 빛을 통과하게 하여 불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부의 승패는 집중을 얼마나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기는 합니다. IQ가 150이상이면 집중하지 않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무언가 성취하려면 렌즈로 포커스를 맞추듯이 집중해야 합니다.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세르티양주는 게으름, 육욕(정념), 자만 등을 얘기하지만 저의 경우는 요즘 유튜브를 들 수 있습니다. 자칫 자제하지 못하면 거의 마약 중독처럼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간혹 생각지도 못한 것을 전해주는 좋은 영상을 만나기도 하나, 득보다는 실이 많습니다. 어느 것이 중요한지, 덜 중요한지를 항상 판단하고 그것을 의지를 갖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넷째, 고요와 고독을 스스로 가져야 합니다. 고독은 능동적으로 스스로 의지로 가지고 하지만 고요는 수동적으로 환경으로 다가옵니다. 고독과 고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초연할 할 수 있고 자신이 해야만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가치로부터 멀리 있어야 공부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고요할 때 좋은 아이디어도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예수회 설교사 라비냥은 “고독은 강한 자들의 고향이요, 고요는 그들의 기도다”라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독과 고요에 매몰되면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주관적인 시야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신의 목표도 흐릿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료와의 교제는 필요합니다. 다만 세르티양주는 할 말만 하고 침묵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렇게 해야 말에 무게를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섯째, 자신이 하는 일(여기서 크게 말하면 학문하는 일이고, 작게 말하면 지금 공부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공부하는 일에 기쁨을 느꼈다면 지금의 저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공부는 기쁨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라고 하는 강압에 의해서, 아니면 혹은 의무감에서 합니다. 오락을 하면 집중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그것을 함으로써 즐거운 느낌 혹은 재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부하면서(이것을 좀 격조 높은 말로 한다면 진리를 찾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앎으로써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보다 공부에 동력을 붙이는 것은 없으리라고 봅니다.


  세르티양주는 ‘기쁨은 영혼을 목표에 단단히 붙들어 매고, 주의력을 목표에 고정하고, 슬픔이나 지루함에 속박당하기 마련인 탐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아퀴나스는 설명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아퀴나스는 13세기의 이탈리아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가리킵니다. 공부하는 데 기쁨을 발견한다면 누가 말려도 우리는 공부에 매달릴 것입니다.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의 『공부하는 삶』을 읽으면서 의외의 말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지 마라’라고 합니다. 지성인이 지나치게 많이 읽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렇다고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걸어다니는 사전’이니 하는 말을 그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스스로 사유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책을 읽고 스스로 사유하고 자신의 말로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도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하나 머리에 남는 것은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인품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갑자기 대학 다닐 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농담반으로 하던 말, ‘의사(지식)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인품)이 되어라.’ 사실 이 말이야말로 우리의 목표 지향점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아도 심성이 왜곡되어 존경할 수 없는 경우도 우리는 봅니다. 반대로 배운 바 별로 없는 산골의 농부의 품성에 우리가 머리를 숙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공부하는 것도 인품이라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칸트의 훌륭한 점은 그의 독창적 철학적 소견보다는 인간으로서 가지려는 존엄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족을 안 늘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 책의 독후감을 쓰는데 오랫동안 주저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하나가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저의 능력으로는 버겁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알고 있어서 행동이 없으면 다만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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