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 할강에는 목표와 집중과 즐거움이 있다‘
칙센트미하이의 책 『몰입의 즐거움』을 읽다가 독후감보다는 수필을 쓰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목은 「삶의 패턴을 바꾸자」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칙센트미하이의 같은 책에 있는 챕터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아마도 지금 제가 살아가는 일정한 형식을 바꾸어보고 싶다는 심정을 나타내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제가 요즘 읽은 마틴 셀리그만, 조엘 쿠퍼먼이 말하는 행복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그 행복을 넘어서 오히려 ‘몰입‘을 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자고 합니다.
몰입이라고 하면 제가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부끄러운 시간이었는지도 모르나 언제라도 생각하면 지금도 뿌듯한 마음이 생깁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입시 시험에서 실패하여 이른바 2류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반학기만에 중퇴를 하고 제가 스스로 결심하여 6개월 동안 학원에도 가지 않고 오로지 도서관에만 다녔습니다. 새벽에 도시락을 두 개를 싸가지고 가서 공부하고 밤에는 별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밤에 보는 별은 영롱했고 어린 제 마음은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제 평생에 가장 몰입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해의 입학시험에는 좋은 성적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몰입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제 제 나이에 너무 많은 혹은 제 능력에 너무 과도한 목표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재 제가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분야이어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 가지 정도가 됩니다. 책읽기와 고전음악 감상과 글쓰기입니다. 왜 하필 이 세 가지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서광은 아닐지라도 젊어서부터 책읽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제 서재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놀란 것은 너무 지적 허영에 젖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반성했습니다. 책을 사다 놓고 읽지도 않은 책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우연히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개업을 하고 돈이 조금 여유가 생기자 오디오를 갖췄습니다. 영국제 스피커 에딘버러, 미국제 프리앰플리파이어, 앰플리파이어인 마크 레빈슨, 불란서제 플레이어 마이크로메가였습니다. 그러나 딱히 음악적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것도 어쩌면 과시욕이겠지요. 왜냐하면 거의 의무적으로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나 소나타 32곡과 현악사중주 16곡을 백번을 목표로 듣자고 결심하고 듣고 있습니다. 현재는 피아노 소나타는 여섯 번째로 주로 점심 시간에 제 직장 옆에 있는 논을 거닐면서 귀를 기울이고, 사중주는 세 번을 마쳐갑니다만 주로 저녁에 헬스장에 가서 걸으면서 이어폰을 꽂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음악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지만 얼마 전부터는 반복되는 마디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무엇보다도 동경하고 또 성취하고 싶은 분야는 글쓰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시를 써보아야겠다는 욕심이 있었고 개업을 하고는 먹고사는 데 바쁘다가 2001년에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의 시창작교실에 들어가서 시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2004년에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과욕이었지만 억지로 시집을 하나 내었습니다. 이제 남은 제 인생의 시간을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여 제 삶의 시간을 메워가자고 생각했습니다. 글쓰기는 의욕은 있지만 항상 느끼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쓰는 것을 주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도 제가 쓴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또 쓰고 나서 그것이 형편없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탈리 골드버그(Natalie Goldberg)가 그토록 프리 라이팅(Free Writing)을 하라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그분이 과제를 내준 것을 충실히 오랫동안 연습해봤지만 저의 그런 두려움은 잘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몰입을 위해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는 동기가 중요하고 했습니다. 목표가 동력을 얻으려면 동기가 중요합니다. 막연히 나는 저것을 목표를 한다고 정해놓고 시작하면 얼마 못가서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동기는 어떤 일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를 말합니다. 이런 현상은 위인전 같은 데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누가 어떤 선생님을 만나서 그분의 연구하는 모습의 진지함을 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도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든지, 유명한 소설가가 헤밍웨이의 문체에 매력을 느껴서 자신도 소설을 쓰게 되었다든지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저의 경우, 목표를 세웠다면 그것의 동기가 무엇으로 할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게 동력을 줄 수 있는 것은 제 손자손녀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존을 위해서 직업을 선택하고 재산을 모아보았지만 그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남겨줄 몫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노트북에 몇십 년 동안 책을 읽은 것, 시를 쓴 것, 수필을 쓴 것, 그 외 시시껄렁한 글들이 많습니다. 제가 물려줄 것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죽고 나서 그들이 저의 이 글들을 보고 저를 알아보며 혹시 하나라도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한다면 제가 족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와 동기가 총론이라면 각론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집중하기입니다. 아무리 목표가 고상하고 바람직해도 실제로 그것이 작동되어 무언가 성취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집중하기에 약합니다. 예전에는 저도 남들처럼 오랫동안 한 군데에 정신력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저의 능력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헛되이 기대하는 것도 무위하다고 느낍니다.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적절히 잘 배분해야지 효과가 있습니다. 예컨대 티비 시청을 장시간 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다음에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일을 하자고 덤벼들었을 때 그는 집중은 커녕 작업 시간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이 에너지를 딴 곳에 쓰고나서 정작 쏟아부을 때는 에너지가 모자라게 됩니다. 저는 실제로 살면서 이런 우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신을 집중하면서 생기는 tension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나이도 있어서 그런 tension을 20분 이상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하는 수가 없습니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방법으로 타협을 하면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몰입을 설명하면서 칙센트미하이가 스키 활강을 예로 들었습니다. 스키 활강에는 몇 가지 체크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는 스키는 산을 내려간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둘째 스키는 집중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 위험이 있어서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집중입니다. 셋째 스키는 활강이 목표이기도 하지만 내려가는 그 자체에서 즐거움, 쾌감을 느낍니다. 사실 이런 즐거움, 쾌감이 없다면 목표를 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즐거움 때문만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즐거움은 없어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감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저에게 적용시킨다면 일부러라도 ‘나는 이 일이 하는 것이 즐겁다’라고 자꾸 저 자신에게 자꾸 주입시키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를 유인하는 셈입니다. 세뇌를 시킨다고나 할까요.
우리 인간의 24시간 활동을 나눈다면 첫째는 8시간 정도의 잠자기가 있습니다. 나머지 시간을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일하는 시간, 여가 시간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인간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들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일할 때 가장 몰입하기 쉽지만 어느 것이나 몰입은 가능합니다.
몰입에는 어떤 기대를 할 수 있을까요? 우선 몰입함으로서 자아를 잊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자신의 성취에 대해 만족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