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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시인과의 만남

“시는 당신에게 왜 있나?”

by 현목

이런 모임에 나가는 것은 난 생 처음이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감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 송 시인을 보자 하얗고 까만 머리가 반반이고 게다가 파마까지 한 모습이 연팡 예술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환갑 나이에 시력이 40년(실제 등단한 것으로 치면 30년이라고 합니다)이라는 것이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충청도 사람답게 ‘샤이’하고 게다가 겸손까지 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연방 나왔습니다. 물론 그 말 뒤에 숨의 그분의 내공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요.


송 시인과의 만남에서 제 나름대로 느끼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분이 자신의 시라고 하면서 A4 용지에 프린트해 온 열 편의 시를 보면서 시를 작법하는 방식은 사람의 얼굴 다르듯이 다 다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새삼’이라고 쓰는 이유는 이것이 무슨 특별한 발견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유추하면 쉽사리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저는 지금 너무 시작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시를 잘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너무 골몰하는 건 아닌가 하는 반성에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시란 작법(기교)과 깊이가 둘 다 양립해야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그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기교보다는 깊이를 더 선택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송 시인이 지나가는 말로 한 ‘이미지 중독’이라는 이야기가 무언가 뇌리에 남습니다.


둘째는, 송 시인은 “나는 시를 엄청 고친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송 시인은 퇴고를 많이 한다는 말입니다. 퇴고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듣습니다. 헤밍웨이는 무슨 작품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퇴고를 40번인가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능력 없는 자가 이른바 퇴고를 세 번도 안 하니 이건 도무지 어불성설인 셈입니다. 왠지 저는 시랍시고 한편을 완성을 하면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를 않습니다. 이 말이 진리 같으니까 그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 실력이 바닥인 것을 아니까 다시 읽어 보면 저도 질릴 것 같으니까 다시 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나쁜 버릇을 하루 빨리 고쳐야겠는데 생각만큼 잘 나아가지 않습니다.


셋째는, 송 시인은 A4용지를 8절 정도로 잘라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하루에 서너 개의 글을 적어 놓는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무언가 감동 혹은 충격 혹은 깨달음을 얻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진동이 매우 크면 당연히 자신의 기억에 남아서 언젠가는 자신의 시적 대상에게로 전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지나가면서 미동처럼 느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기록해 두지 않으면 다시는 자신의 기억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소중히 하여 기록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송 시인은 8절로 자른 A4용지를 이용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런 것을 알고 잘 기록해 보려고 수첩도 사보고, 아이폰의 메모지에 적기도 하지만 무언가 불편하여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송 시인의 방법도 잘 이용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흘러가는 강의 도중에 송 시인도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므로 이해가 빨리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의미가 있는 말이구나 하고 적어 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은유는 안 했다. 환유는 했다.”

“시를 나무라고 하면 나무는 뿌리, 줄기, 가지, 잎이 있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내 시의 스타일이다.”

“20%는 수면에 올리고 80%는 수면 아래로 내린다”

“나는 많이 안 썼다. 소심하게 썼다. 그래도 쓸 것은 썼다.”

“이미지 중독자가 아닌가?”


마지막에 김언희 시인이 송찬호 시인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만남’은 끝이 났습니다. 그분의 글은 여기 저기서 읽었지만 이 장소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김 시인은 워낙 시적 소재가 예사롭지 않아서 읽는데 제법 신경을 써야 하고 어떤 때는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66세라고 하니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나이가 들었습니다. 김 시인의 송 시인에게 한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시는 당신에게 왜 있나?”


시를 써서 저도 시인이라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있을까요? 아니면 시를 짓는 데 대한 즐거움이 있어서 일까요? 인생이라는 것은 나이가 이쯤 들고 나면 적어도 출생 전과 사후는 알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생애 동안 인생에 대해서 누구나 이게 뭘까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다만 누구는 먹고 사는 생존 때문에 그런 기회가 적기도 하고, 누구는 특별히 이것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여 출가하여 한 평생 이 문제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는 살면서 닥치는 이 안개같이 자욱한 세계를 시라는 형식을 통해 저의 식으로 해석하고 정리하는 한 방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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