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면 우선은 생물학적인 고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생명 현상은 전문가가 보면 더 깊은 관찰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두 가지를 생각한다. 먼저 인간의 생명체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을 맡은 심폐기능을 담당하는 장기를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 동력에 의해 인간의 의식이 생기고 수많은 물리화학 작용에 의해 한 인간이 평균 80년 정도 기능하는 것이다. 이들 장기가 수명이 다해 동력이 멈추면 의식작용을 비롯한 세포의 생명 현상들이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그 개체가 죽었다고 부른다.
육체를 이루고 있는 원소들이 다 무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 원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부모를 통해서 생성의 빌미를 받아 거의 이십년 동안 양적으로 질적으로 팽창해 왔고 그 나머지 시간 동안은 서서히 죽음의 과정으로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명 현상을 가진 생물은 수도 없이 많으나 오직 인간만이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고급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식은 자신이 누군가 하는 의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세분화되고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만이 자신의 죽음을 관찰하고 그 죽음 이후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 한다. 육체는 이미 지상에 흘러들어갔기에 죽은 다음의 육체는 생전에 사용하던 원소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인간의 관심은 오로지 나의 정체성을 인식했던 자아가 어떻게 될까에 집중되어 있다.
대체로 인간은 세 가지로 생각하지 않나 하고 나는 짐작한다.
첫째는 불교관인데 물론 나는 불교에 대해 전문지식이 없으므로 정확히 말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일단은 들은 풍월로 말할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얼핏보면 상당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로 돌아가고 다시 오랜 세월―이른바 윤회―을 통해 흩어졌던 어떤 개체의 원소들이 다시 모여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는 거의 제로이지만 또 딱히 제로가 아니므로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그 모인 원소들이 원래 태어났던 것처럼 생명을 띄고 의식이 돌아와서 생명을 일정 기간 영위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그런 생노병사가 그저 생겨날 수는 없고 초월적인 어떤 힘―작용―에 의해서 일어났던 것이고 따라서 죽어서 육체는 비록 이 지상에 남지만 의식―영(spirit)―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다. 의식 중에서도 성령(Holy Spirit)이 인간의 의식 가운데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 의식의 한 부분은 특별한 하나님의 영(Spirit)이 거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좀 더 기독교적이랄까 영적이랄까 하는 사람을 성령이 충만하다고 부른다.
세 번째가 이른바 무신론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의식은 물질의 소산이고 그 물질이 생명을 다하면 의식도 무로 귀환한다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개체가 생겨난 것도, 생명체 안의 그 정교한 작용도 어쨌든 ‘우연’이라고 강변한다. 그것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체로 죽은 다음의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는 이 세 가지 범주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나는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그것은 한 인간의 투철한 사고의 결과일 수도 있고 그가 살아온 환경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결정한 피동적 결과일 수도 있다.
문제는 객관적으로는 이렇게 추론이 가능하지만 막상 자신이 죽음 앞에서 설 때 누구나 두렵고 어찌 할 바를 몰라서 당황한다는 데 있다. 이성적 이론과 현실에서 받아들이는 감정의 반응은 반드시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같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이른바 수련이라는 내공이 필요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누구나 먹기 살기 바빠서 허둥지둥 살다 보면 죽음이 코앞에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