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친구의 사랑과 존경과 자신의 존엄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나의 앞에 걸리는 장애물은 우선 나의 기(氣)로써 덮쳐버려야 한다. 나는 상대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 죽도의 검선(劍先)이 서로 닿자마자 몸을 던졌다. 나의 무례에 당황하는 저쪽의 표정이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이기는 것이 목적인 이상 이러한 사소한 결례는 승리의 왕관 앞에서는 당연히 전리품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인간이란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큰 먹이를 가진 자만이 세상을 정복한 복된 자이라는 건 역사책을 뒤져볼 것도 없이 조금만 생각하면 알 일이다. 공격만이 최선의 방어이니 쉴 틈을 주지 말고 두들겨 패야 한다. 검법이니, 중단을 잡아서 타고 치라느니 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이다. 맛있는 것 먹고, 좋은 집에다가 번쩍이는 차 타고, 자식 새끼 잘 나가고, 건강검진 받아 이상무이면 행복하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권력이나 명성을 잡으면 로토 복권을 잡은 거다.
몸이 엉킨 이때가 나의 특기를 발휘할 때이다. 밀어버리고 허리치고 도망갔다. 검이 얽히고 설키고 아수라장이 될 때가 기회이다. 올바른 도덕의 실천과 행복이 합치하는 것이 최고선의 길이라고 칸트는 말했지만 그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그것은 방에서 궁리나 하는 선비의 말이지 진흙 바닥에서 뒹구는 장삼이사(張三李四)는 뒤통수를 치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먹이를 가져와야 한다. 퇴격머리 치고 숨 돌릴 틈도 없다. 또 다시 붙어야 한다. 거기에 합기(合氣)니, 중심을 뺏느니, 상대의 마음을 치느니 계산할 것도 없다.
검법이란 한가한 소리가 아닐까. 어쩌면 최선의 길은 거머리가 가르쳐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류 역사상 다 그래 왔고 다만 인간의 품격을 위해 구색으로 법이니, 도덕이니 하면서 허울을 둘러왔지만 본질은 너 죽고 나 살기이다. 아니 조금 양보하면 너 살고 나 살기이지만 그것도 내가 여유가 있어야 하는 말이고, 기왕에 나오는 죽도를 털었으니 머리를 쳐야겠다.
작심하고 앞의 작자를 두 주먹으로 밀고 퇴격손목을 쳤는데, 분명히 들어갔는데도 깃발도 안 들어준다. 하기사 세상이 그리 만만한 건 아니지. 그랬다면 살면서 이런 개고생을 할 리도 없겠지. 내게 달려드는 것을 피하면서 팔꿈치로 모가지를 밀었더니 마루에 나뒹굴었다. 기회는 이때라고 죽도로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상대는 겨우 죽도를 사선(斜線)으로 들고 막고서 일어났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으니 속이 쑤신다.
머리를 이렇게 아프게 치는데도 심판은 한 번도 손이 안 올라간다. 거리가 안 맞는다는 게다. 원간(遠間)에서 촉인(觸刃)을 만들어 조금씩 파고드는 정통 검도를 원하는 모양인데 무조건 쳐야 하는 거다. 그러면 개중에 하나가 맞는 확률이 더 높은 거다. 에라 또 먹어라. “머리!” 앗, 깃발이 올라갔다! 드디어 한입 먹었다. 바로 이것이 나의 지론이다. 깨끗하게 지는 것보다 지저분하게라도 이기는 것이 낫다. 드디어 나의 승리이다. 의식주를 일단은 획득했다.
하지만 저쪽과 예를 하면서 물러나오는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검은 구름이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젊었을 때의 치고 박고 지낸 시간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이제 내게 세월은 눈(雪)이다, 고령자들이 앉아 있는 머리마다 눈이 하얗게 내렸다. 일어서는 관절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바람에 얹혀 귓가에 밀려온다. 선수 선서를 하는 늙은이가 들은 오른손은 걸어온 길에서 항복하지 않았다는 선언이다. 그들의 말없이 수긍하는 모습은 숙인 고개에 나타난다. 저려오는 발바닥, 땡기는 허리를 잡고 서 있는 존엄이 가볍지 않다. 스스로 치는 박수 소리가 가슴속의 평안으로 이끈다. 앞을 향하여 예를 올리는 인사는 그들의 겸손이다.
가슴을 펴고 서 있는 눈빛에 푸른 바다의 수평선이 깃든다. 할미새 꼬리처럼 흔드는 검선이 상대의 틈을 탐색하면서 수련한 시간의 축적인 몸을 던지면서 뛰어들어 머리를 치는 척하다가 허리를 쳤으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건 속임수라 바른 길이 아니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사특한 길이 아니라 큰길로 나가서 실력이 부족하여 목숨이 다하여 생을 끊어야 한다면 져도 후회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의 원칙을 안다고 내 몸이 그걸 언제나 따라갈 만한 도력(道力)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지니고 가야 할 숙명(宿命)인지도 모른다.
세상 살면 내 뜻이 아니라 어쩌면 운명이 이끈 길이라면 어쩔 수 없이 상대와 얽혀서 드잡이질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 것이다. 상대와 나는 이미 몸이 칡덩쿨처럼 얽혀 서로 당기고 있다. 이때는 모든 것을 버려도 이 험한 운명의 길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상대를 밀고 허리를 치고 나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유의지로 내가 선택한 도덕의 실천을 위해 앞으로 나가면서 상대의 죽도를 타고 머리 한판을 쳐도 내 능력 부족으로 손목을 얻어맞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얻어맞아도 당당한 편안한 패배이기도 하다. 지혜의 원리와 원칙을 알고 있어도 이미 몸은 낡은 느티나무가 되어 내가 가라는 곳으로 몸이 가지 않는 서글픔이 발목에 걸린다.
회심의 한발을 작심하고 상대가 나오는 것을 직감하고 중심을 타고 나갔으나 상대는 이미 눈치채고 죽도로 가로막았다. 밀고 당기는 어수선한 가운데 나의 자아는 사라지고 팔다리가 따로 노는 유체이탈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상대가 나온다는 감이 왔다. 승부의 몸을 던졌으나 상대는 나의 의도를 미리 알아차리고 나의 죽도를 스쳐올리고 허리로 돌려친 것이다. 순간 내 마음은 하늘을 나는 구름처럼 가벼워졌다. 젊어서 입으로 물어뜯던 집착을 다 걷어버리고 난 탈속이랄까. 오직 행복만을 눈이 벌개서 쫓아다니던 세월이 이제는 몰락한 헌 조각으로 날아가는 순간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삶을 마감할 때 가족과 친구의 사랑과 존경과 자신의 존엄을 후회없는 슬픔 가운데서 맞이하라고 했다. 평생 먹이를 찾아서 이빨로 짓이기고 다니던 나를 누가 존경의 마음을 품을까. 나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세운 원칙도 지키지도 못한 나는 존엄이나 구비하고 있을까. 나는 평생 두들기고 치고 때리고 부딪치고 진흙 바닥에 뒹굴다가 여기까지 왔다. 내 마음이 가벼워진 것은 저쪽이 내가 머리 치는 칼을 돌려서 내 허리를 침으로써 그 지긋지긋한 나의 망령을 날려보내 준 것이다. 지저분하게 이기는 것보다 깨끗하게 지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