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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기도문

by 현목 Jan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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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옛말에 칠십고래희라고 했으나 지금은 80, 90은 예사입니다. 왕유 시 중에 七十老翁何所求(칠십 노옹이 달리 그 무슨 희구하는 바가 있으랴)라는 시구도 있습니다. 이 나이 되도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살아왔으나 득도한 것은 물론이고 조그만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기도를 아니,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성경은 사실 그 원문을 모릅니다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문자를 깨쳤으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평이한 문장들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일반사람들이 누구나 신학자나 교수 수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평생 살다 보면 그저 문자나 깨쳐서 이해하는 정도일 겁니다. 그런 그들이 어찌 신앙의 철리를 다 깨달아 알겠습니까. 개 중에는 특출난 사람도 있을 겁니다만 대개는 다 고만고만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것은 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립서비스로 나라라든지 전도라든지, 타인의 복을 기도하는 것은 있을 겁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기복 신앙이라고 타기할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신앙 자체가 자신의 사후의 영혼의 이익의 추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이익 추구라는 것이 조금만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간구가 충족되었다면 필시 나로 인해 손해 보는 사람도 생깁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논리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예를 들어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나는 저런 신세가 되지 않게 해 주었으니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걸인은 무엇이 됩니까. 나는 걸인이 아니니까 우선 주신 복에 감사하고 저 걸인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 걸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에 단지 감사할 뿐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요 자기 이익추구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간구한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판단은 언제 내려야 하나요. 왜냐하면 그 기도의 충족이 지금 이 시각에는 성취되었다고 자신은 생각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결코 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동양의 지혜는 이것을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합니다. 자신의 기도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어 감사한다면 같은 논리로 기도가 반대의 결과를 가지고 왔다면 감사가 아니라 불평과 실망의 소리를 해도 된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런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것도 일리는 있지만 반드시 논리적이고 일관된 잣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교회 갔다가 오다가 아파트의 주차 공간이 열악하여 속으로 하나님, 차 주차할 자리 하나 주시옵소서 하였더니 정말로 자리가 하나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감사하고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기분이 좋겠지요, 하지만 다음 주에 같은 기도를 하였으나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투덜대어도 감사의 논리대로 하자면 그것은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이 주차 자리의 기도는 오히려 나의 우연에 의한 무수한 선택의 경우의 수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우연에 의한 무수한 선택의 경우의 수가 만나서 일어난 인과율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는 그것을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요. 상상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인생 칠십이 되어 30년, 40년 교회에 다니지만 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나의 안위를 위한 개인적인 이기심이 거의 다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를 깨우쳐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인생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수준 높은 경지를 요구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신자에게 구하는 것도 그럴 것입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병에 안 걸리고 건강하게 지내고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남들에게 보란 듯이 고대광실에 살고, 거기다가 남들에게 존경의 소리를 듣고 살기를 원하는 게 보통 사람, 아니 신자의 바람이 아닐까요. 신자들의 이타적인 기도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속에 들어 있는 기본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애꾸눈 신앙’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어떤 교리나 신조에 가두어 놓는 그런 인식에서 더 이상은 놀고 싶지는 않습니다. 특히 교회의 목사들의 설교에서 너무나 ‘애꾸눈‘ 설교를 많이 봅니다. 기도를 많이 했더니 하나님이 복 주셔서 병을 낫게 해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양자가 갈라지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선행입니까. 기도의 간절함입니까. 믿음의 양과 질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떤 논리도 없습니다. 그것을 자꾸 성경이라든지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하는 어떤 기준에 맞추면 ’애꾸눈‘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즈음 저의 신앙의 근본이 흔들림을 봅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혼동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애꾸눈’은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좀 더 넓은 안목을 가지고 이해되지 않으면 모른다라고 말하고 성경에서 이상한 부분은 자꾸 어떤 억지에 쑤셔 넣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유보하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좀 더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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