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여울 속의 연꽃과 바람’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서정주
요 며칠 사이에 결단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이 먹다 보니 무슨 일이든지 하려 하면 우유부단하게 된다. 노트북을 하나 새로 개비하나 아니면 싼 넷북으로 아쉬움을 달래려나 하고 씨름하다가 그는 아내로부터 한소리 들었다. 이것저것 고르지 말고 그냥 저지르라고. 별 차이가 있겠느냐고. (설마 여자를―그 역도 마찬가지지만―선택하는 것도 그럴까?)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오리무중에 빠져들어갔다. 이것저것 다 고려하니 어느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를 모르겠다.
왜 갑자기 서정주 시인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시가 생각났을까? 『동천』이란 시집에 실려 있다. 집 서재의 한구석에 있던 시집을 꺼내 보았다. 책장이 누렇다 못해 바스러질 것 같다. 민중서관에서 발행했고 1968년 그가 대학 들어가던 해에 발행되었고 1969년 3월이라고 구입한 날짜가 책의 마지막 장에 쓰여져 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43년 전 이맘 때였나보다. 개나리 피던 날이었다. 입학식에서 그의 머리 속에 인화되었던 그녀의 모습이 지나치면서 쳐다본, 팔에 난 보시시한 솜털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지금이야 세월의 여울에 그나마 남을 있을 턱도 없겠지만. 그 후의 스토리는 그의 소싯적 ‘러브 스토리’의 용렬함만 더 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이 어찌 그다지도 주변머리가 없고 융통성이 없었는지 답답하다. 하기야 지금이라고 뭐 별 뾰족하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촌놈이 서울 와서 생전 처음 듣던 '미팅‘장에 나가면 왜 그렇게 열등감에 사로잡혔던지…. 언젠가는 미팅장에서 그의 남방셔츠가 촌스럽다고 여학생들이 쑤군대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의 잠재의식 속에는 여자들이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라고 결론을 내렸는가 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녀에게 프로포즈 한번 못하고 친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라는 말을 싫어했다. 상대가 싫다고 하면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지 자기 욕심 채운다고 열 번씩 도끼질 하는 게 온당하냐고, 그나마 그것이 그를 지지해 주는 변명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용기 없음의 구실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시절 그에게 위로를 준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서정주의 이 시와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었다. 전자가 그를 은밀히 달래 주었다면 후자는 그에게 힘을 주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짝사랑한 그 경력 때문에 그와 동병상련의 심정이라 마음이 기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2악장의 오보에가 솔로로 하늘 높이 울려퍼질 때 그의 마음이 바로 그랬다. 오보에의 가늘고 높으며 부피가 약간 있는 소리가 가슴 속에 가득하였고 그는 눈을 감고 그 오보에 소리에 잦아들었다. 그 소리가 구원이었다면 지나친 언사일까?
바람은 이제 연꽃을 만나고 돌아서야만 한다. 슬픔이 너무 과하지 말자고 바람은 스스로 다짐한다. 너무 슬프면 자신을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 된다. 너무 섭섭하면 원망이 된다. ‘아조 섭섭지는 말고’, 섭섭함과 원망의 경계를 지나면서 서정주의 시가 얼마나 그를 따뜻하게 해주었던가. 그것이 비록 유치찬란하더라도. 보내지만 그러나 다시 만나 볼 기회를 영영 잃고 싶지는 않았다. 연꽃을 어제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에 만나고 가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게 연꽃은 이미 과거가 되고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가 사랑한 것은 이제는 연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다. 그 과거의 여인이 나타나면 사랑할 수 있을까? 그가 사랑하는 것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의 기억뿐이다.
그의 인생의 기억이 되어버린 연서를 접어야 할 때인가 보다. 『동천』 시집의 낱장처럼 그의 기억도 이제는 바랬다. 후회는 없다. 기억의 여울 속에 연꽃과 바람과 오보에 소리가 유물처럼 숨겨져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