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인간관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자서전인 『생의 수레바퀴』를 읽었습니다. 스위스 취리히의 최대 사무용품 회사의 부사장이 부친이었습니다. 1926년에 태어났으며 상류층의 자제로 어려서부터 평화봉사단으로 참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취리히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던 유대인 미국인 매니와 결혼하고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평생 정신과 의사로 살았습니다. 그녀의 가장 큰 관심은 정신과의 대표적 병인 조현병(調絃病) 등의 약물치료가 아니라 ‘죽음’이었습니다. 그녀의 탁월한 업적은 사람이 죽음에 임하여 겪는 심리상태가 어떠한가를 밝힌 데 있습니다. 유명한 5단계가 있는데, 처음에 죽음을 부정하다가 분노하고 타협하다가 우울에 빠지고 나중에는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녀가 평생 주장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애정 어린 따뜻한 말로 대하라는 것과 죽음이란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비가 고치에서 날아오르듯이 우리의 몸인 고치를 떠나 영혼은 사후세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면도 있지만 그에 대한 논란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생의 수레바퀴』를 읽다가 제 눈에 확 띄는 구절이 보였습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 생존하는 것에 있다고 깨달았다. 일찍이 “나의 목표는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것에 있다”라고 마음의 수첩에 적었던 내게 그것은 살아가는 동안 가장 깊은 교훈이 되었다.’
이제 와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뭐가뭔지도 모르고 부모님이, 선생님이 일류중고등학교, 일류대학을 가라고 하니 입학시험을 쳤고 어쨌든 면허증 하나 따서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이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의사가 되든, 판검사가 되든, 음식점 주인이 되어 비린내에 찌들든, 막노동판에서 찌든 땀을 흘리든 모두가 따뜻한 세끼 밥을 먹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원의 사자가 사슴의 목을 물어뜯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를 씹어삼키는 것이나 참새가 먹이를 찾아서 종종 걸음으로 볍씨를 쪼아먹는 것은 인간이 갖은 양념으로 요리하여 화려한 접시에 얹어 품위 있게 먹는 것과 본질은 같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퀴블러 로스 말대로 ‘단순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은 이념을 낳는 사고력이 뛰어나 거기에 대해 화려한 옷을 입혔습니다. 옷을 벗고 나면 가식없는 우리의 맨몸―본질―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빌 게이츠라도 해도 삼시 세끼를 먹고, 아무리 그가 산해진미를 먹는다고 해도 위장소장대장을 거쳐 영양분을 섭취하고 분변이 나옵니다. 그것은 앞에서 본 사자나 참새나 다 같습니다. 직업은 모두 화려한 간판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화려한 옷을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옷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따뜻한 세끼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소박한 옷이라도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삼시 세끼 따뜻한 밥을 먹기 위해 진지하고 겸손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진면목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착하게 하고 그렇게 하다가 때가 되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남의 간섭 없이 자신이 결정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은 가지고 태어납니다. 스스로 결정하여 인간은 다른 동물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도덕을 세웠습니다. 아무리 양육강식의 동물세계이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완벽하지않아도 도덕에 의해 인간의 본능을 자제하는 망을 세워놓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만한 인류의 발전을 이룩한 것은 도덕의 실천에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공자의 『논어』도 들은 풍월로 알고 있지만 결국은 인간의 도덕에 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성경』도 근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하고 도덕을 지키라는 계율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의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라.” 지성은 해박한데 인간성이 못돼먹은 사람도 종종 만납니다. 병은 잘 고치나 성격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인간의 위대한 업적과 그의 선함을 혼동합니다. 아무리 탁월한 학문의 소유자일지라도, 천재적인 예술가일지라도 그의 도덕성과는 별개입니다. 배운 것 없어도 선량한 사람을 가끔 만납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끼리 관계를 맺어가면서 살아가는데, 한 인간의 수명 동안 선한 인간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신이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봅니다.
인간은 본능과 지성과 이성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평생에 이룰 꿈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합니다. 꿈은 깨어나면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도 죽고 나면 우리가 꾸었던 꿈은 소멸하고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 먼 하늘의 별처럼 아련한 꿈 하나는 가지고 이룰려고 애쓰다가 가야합니다.
송재학 시인은 「공중」이란 시에서, 공중은 허공을 실천하고 있고 허공에는 색깔이 있다고 했습니다.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 곤줄박이 새의 회색 깃털과 갈색의 목덜미와 배라고 상상합니다. 우리의 꿈도 허공의 색깔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름답지만 사라지고 허공만이 남을 것입니다.
자신의 직업이 꿈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릭 캔델은 이차세계 대전 중에 나치의 박해로 말미암아 미국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미국에 와서 의과대학을 선택하고 신경생리학자의 길을 갔습니다. 평생 바다 달팽이 군소의 신경세포를 이용하여 하나의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의 신경전달 기전을 전기신호에서 화학신호로, 거기서 다시 전기신호 이동하는 기전을 밝혀냅니다. 그 업적으로 200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합니다. 자신의 직업을 통해 에릭 캔델의 꿈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저의 꿈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게 됩니다. 저는 에릭 캔델처럼 저의 직업을 통해서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 의사들처럼 헌신적 봉사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젊어서부터 해오던 글쓰기를 신춘문예에의 당선이라는 꿈을 재작년부터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루어질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꿈을 꾼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렘이 생깁니다. 또 하나의 꿈은 50대부터 시작한 검도의 승단이라는 꿈을 아직 버리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4단인데 6단까지 가보려고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감히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발한발 다가가려고 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 가까이에 산이 하나 있습니다. 비봉산은 142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비봉산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있습니다. 저의 안목이 비록 저 천왕봉이나 백두산, 아니 에베레스트와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인생 삼훈의 풍경이 비봉산 위에서 나지막하게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