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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 Jan 02. 2022

남편 머리 하는 날

나는 오늘도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

오랜만에 남편이 머리 하는 날이다. 어젯밤 11시까지 아이와 씨름하고 주말을 맞아 겨우 늦잠을 자다 일어난 내게 남편은 성화다.

"빨리 나가자! 미용실 10시 오픈이야!"

나도 안다. 하지만 자신의 옷만 챙겨 입으면 되는 남편과는 달리 난 아직 세수도 못했다. 눈곱만 떼고 나가보려 했지만 오늘따라 눈곱은 왜 이리 많아. 겨우 고양이 세수만 한 후 보이는 옷을 마구잡이로 꺼내 입는다. 떡진 머리는 질끈 묶고 폭이 넓은 머리띠로 감춘다. 그러면 외출 준비 끝이냐고? 아니다! 난 이제부터 아이 옷을 챙겨 입혀야 한다. 남편은 벌써 현관 앞에 나가 기다리고 있다. 제발 좀 천천히 기다려줄래? 그렇게 집을 나오고 나니 난 벌써부터 녹초다.

남편 머리 하는 날 내가 구태여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아이를 데리고 함께 가는 이유가 있다.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아이의 이발도 함께 시도해 보기 위함이다. 아이는 이발을 특히 무서워한다. 뽀로로를 보여주고 제일 좋아하는 간식을 손에 쥐어줘도 아이는 요리조리 도망가기 바쁘다. 그러니 머리는 항상 비뚤배뚤 난리도 아닌 것이다. 아빠가 머리 자르는 모습을 보여주면 좀 나을까 싶어 따라나섰는데 오늘도 실패다. 미용실에서 준 아이스티만 호로록 마신 후 나를 문 밖으로 잡아 끈다. 이제 집에 가자는 거다.

처음 방문한 미용실에서는 원장님께서 서비스로 남편 옆머리 파마까지 해주신다고 한다. 아! 감사하면서도 길어진 시술 시간에 아이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나는 눈앞이 핑 돈다. 이런 생각을 할 찰나의 순간, 아이는 이미 건물 밖을 나가 차도로 돌진하고 있다. 난 치마를 입고도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아이를 잡으러 뛰어간다. 겨우 잡은 아이를 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불만족스러움을 모든 손과 발을 굴러가며 표현한다.

하는 수 없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고자 난 빵집 앞으로 가서 아이를 회유한다. 이내 아이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다. 그새 몇 번 와봤다고 본인이 먹고 싶은 빵과 우유를 척척 고른 후 맞은편 공원으로 나를 이끈다. 빵집 앞 공원은 아이와 나의 아지트다. 남편과 다퉈 울적할 때, 거울 속에서 결혼 전과는 낯선 내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질 때 난 아이와 이 공원으로 산책을 왔다. 그리고 아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많은 위로가 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이미 한 달 동안 가정보육으로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공원 안을 활보하는 아이를 쫓아다니는 것도 버겁다.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하고 난 듯 호흡은 가쁘고 머리는 어지럽다. 아직 위험한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는 미끄럼틀에 거꾸로 매달리고 시소에서 곡예쇼를 한다. 이제 제발 그만하자...

드디어! 멀리서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그동안 놀아 준 엄마는 안중에도 없이 아빠에게 달려가 안긴다. 남편은 기분이 꽤 좋아 보인다. 머리가 아주 잘되었다며 핸드폰 카메라까지 꺼내 들고 보고 또 보고 있다. 그제야 생각이 난다.


 아 나도 머리 잘라야 하는데.


그런데 이 머리를 하고 미용실에 가기 부끄럽다. 지금 내 머리는 아이와 뛰어다니느라 산발에 며칠이나 감지 못했다. 내일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단정한 머리로 미용실에 가야지. 머리 감기, 이발하기. 남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나에겐 왜 이리 힘든 건지. 아이가 커갈수록 조금씩 나아지겠지. 그나저나 벌써 점심시간인데 오늘은 또 뭘 해 먹지?


"오늘 점심엔 카레 만들어 먹을까?"


남편의 머리 하는 날, 나는 오늘도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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