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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빈 Jun 06. 2024

선생님, 진료를 봐줄 수 없다고요?

연신내에서 빅 5까지, 정신과 진료기 (1)

 처음 병원에 가던 날은 기억에서조차 희미하다. 끊어져가는 동아줄인 줄 알면서도 거기에 온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던 것 같다.  당시 나는 22살 대학교 3학년, 정신적 고통을 넘어선 신체적 고통으로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갈까 말까 고민이 되는 게 아닌 더 이상 안 가면 죽는다 싶을 정도로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주관적인 괴로움과는 별개로 뚜렷한 증상이 있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다루겠지만, 제거형 폭식증이 너무나도 심했다. 내 폭식증은 거식증과 유사한 점이 있어 그냥은 한 숟가락이라도 맘 편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며칠을 쌩으로 굶다가 한 끼를 미친 사람처럼 먹고 다 토해내길 반복했다. 그렇게 반년 이상을 보내며 10kg가 빠졌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꿈을 꿨다. 좋은 꿈이건 나쁜 꿈이건 간에 그건 나를 꿈속에서 조차 지치게 했으며, 수면 도입과 수면유지가 동시에 불가능했다. 하루에 5시간 이상 잔 날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꿈조차 죽는 꿈을 꿨다. 아마도 죽는 게 나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자 목표였기 때문이 아닐까. 알코올의존 또한 심했다. 잠을 못 자니 자꾸 자려고 술을 마셨다. 그게 몇 달을 가자 술을 안 마시면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맥주 한 두 캔에서 시작해서 소주 1병 그리고 매화수 2병, 보드카와 위스키까지. 술 또한 내 우울과 함께 넘쳐흘렀다. 자꾸 혼자 술을 먹는 것도 문제였다. 혼자 방에서 노트북을 켜고 술을 마시며 울었다.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며 왜 우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내 현실을 도피했다. 바닥으로 꼬라 박은 내 인생을 분석하고 성찰하고 또 반성하며 살아내기도 아까웠던 시간을, 우울한 생각이 들 때면 술을 마셨다. 꼭 생각을 해야 한다면 남 탓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불행의 원인을 찾았고, 모두를 미워했고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과잉된 불안도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코로나 덕에 수업에 대면으로 출석하는 날은 거의 없었지만, 사범대에 재학 중이던 나는 종종 모의수업을 준비하고 시연했어야 했다. 수업을 하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다. 가만히 누워 있다가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방에서 숨을 헐떡였고, 너무 자주 어지러워서 전시회에서도, 길에서도, 집에서도 쓰러졌다. 병원에 가서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는 진단까지 받았다.


 가장 가까운 동네 정신과를 예약했다. 평판이 더 좋은 병원도 있었지만, 병원에 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후에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병원에 들어가 설문지를 받았다. 하루 중 대부분 우울한 기분이 지속된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설문을 풀며 내가 불행하고 우울한 사람이 맞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증했다. 아마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우리 집이 쫄딱 망했던 순간도, 브랜드 신발을 안 사준다고 떼쓰다 달리던 차를 멈추고 쫓겨나던 순간도, 학교에서 뺨을 맞고 사람 취급도 못 받던 순간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텨왔는데. 삶이 역설적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온전해진 지금에 와서야 나 자신이 무너지기 시작하다니. 나는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3년이 걸렸다.


 첫 진료를 받으며 숨쉬기도 어려운 불안에 시달렸다.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진료를 봐주시던 연신내의 작은 병원의 선생님께서 많이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말씀하실 정도였다. 입으로는 폭식증이 심해서, 잠을 못 자서 병원에 내원했다 말하며 몸을 쉴 새 없이 떨었고 누가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진료실 안을 끊임없이 훑었다. 약을 꼭 먹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그 후로 5개월 동안 길면 일주일, 짧으면 3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며 약을 올렸다. 당시 학생이던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지만 불행히도 약 또한 효과가 없었다. 불안은 벤조디아제핀의 힘을 빌려 대중교통을 탈 수 있을 정도는 잡혔지만, 여전히 못 잤고 여전히 죽고 싶었다.


 꾸준히 악화되던 상태에 자살시도를 하는 지경에 이르자 동네병원에서 진료거부를 당했다. 더 이상 자신의 병원에서는 봐줄 수가 없으니 대학병원으로의 의뢰서를 써준다며 예약을 잡아보라 말했다. 더 이상 경증이 될 수 없다는 정신과적 사형선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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