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값진 하루

by 얀느

오늘은 내가 사서로 근무하는 학교의 재량휴업일이다. 그동안 학교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터라 큰 일을 끝낸 직후 아무 걱정 없이 쉴 수 있는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무엇을 하며 이 값진 휴일을 보낼까? 일을 시작하면서 자주 만나지 못했던 동네 엄마들을 만날까? 아니면 오롯이 나 혼자만의 하루를 보낼까?


나에게는 하루짜리 휴일을 내어줄 만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아이를 낳고 불안과 공허감이 커지던 시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서투른 육아를 하며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위로와 버팀목이 되어주던 육아 동지들이었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쉽게 만날 수 없어 아쉬웠는데 오늘 같은 날 그들과 만나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한편으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은 마음도 크다. 아이들은 커가고 일하며 집안일 챙기느라 내 인생 중 가장 바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 간절한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다. 조용히 책 읽으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 생각이 문장이 될 때까지 쓰고 지우며 한 단락의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영혼까지 쉼이 되는 휴식이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


‘그나저나 지금 몇 시지?’ 아차! 아침 10시가 넘어버렸다. 고민 끝에 오늘은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며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독자로서, 글쓰기를 막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글의 세계를 동경하고 흠모한다.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리는 집의 고요가 이렇게나 행복하다니! 베란다 문을 열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날이 차갑지 않아 나들이 가기에 딱 좋은 날씨지만 나는 오늘 어디에도 나가지 않을 예정이다.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노트북을 켰다.


그때 아이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윗집 소음치고는 가까이서 들린다 싶었는데 문이 열리고 큰아이가 나타났다. “어머나! 학교 안 갔어?”, “오늘 우리 학교에서 수능 봐서 학교 안 나가. 엄마, 나 엄청 배고파.” 나만 쉰다고 좋아했는데 아이가 학교 안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아이와 단둘이 쉬는 날이 되었으니 혼자만의 시간은 뒤로 미뤄두고 함께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로 했다.


오늘은 어제만큼 춥지 않아 나들이 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우리는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초밥집으로 향했다. 가격도 괜찮고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라 한번 가보자고 벼르던 곳이었다. 평일이니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를 잡아 런치 세트를 먹을 수 있었다. 아이가 맛있다고 엄지척했다. 나도 웃으며 쌍 따봉을 만들었다. 집에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그 옆 카페 창가에 자리 잡아 자몽 애플 티를 마셨다. 아이는 휴대폰은 꺼내지도 않고 불만 가득 섞인 눈빛도 아닌 귀여운 미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내 앞에 앉아 있다. 아!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사실 올해 들어 아이와 거리감이 부쩍 생겨버렸다. 고등학교 입학하고서 처음 치렀던 시험 결과에 실망한 아이가 자포자기를 해버렸다. 자연스레 생활 습관도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던 엄마의 노력은 서로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어버렸다. 차를 마시며 그동안 아이로부터 들어보지 못했던 학교와 친구 이야기부터 요즘 고민, 가고 싶은 대학교까지도 조근조근 이야기해 주었다. 나도 요즘 일과 관심사,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얘기해주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오후가 되어버렸다.


오랜만에 아이 손을 잡아 보았다. 어릴 때는 내 손안에 꼭 쥐어지던 작은 손이었는데 이제는 손도, 키도 엄마보다 커버렸다. 아이 손잡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날씨도 좋고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도 기분이 좋은 오후였다. 한 번씩 삶이 선물처럼 건네주는 작은 행복을 만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값진 하루를 써프라이즈 선물로 받은 것 같은 기분, 이 선물로 아이의 추웠던 마음에도 따뜻한 온기가 들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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