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살리는 일

연민, 배려, 동정에 관한 것들

by 얀느

뉴스에서 전쟁, 사건, 사고, 유명인의 사망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영화에서나 보던 사건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자극적인 기사들을 내보낸다. 기술의 발전으로 육체는 훨씬 편해진 것 같은데, 주변의 더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우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아이들의 미래는 지금처럼 암울하기만 한 것일까. 그래도 나는 믿고 싶은 구석이 있다. 우리가 가진 인간애, 따뜻한 마음, 이타심, 배려 같은 것들을 믿어보는 것이다. 웬 순진한 이야기냐 싶겠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주제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뜻한 인간애가 결국 서로를 살린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 있었다. 남편과 내가 경험했던 일이다.


여러 해 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저녁으로 피자를 배달시켜 먹기로 했다. 주문을 하려는데 배달이 밀려 1시간 반이나 걸린단다. 내가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피자집에 가서 사 오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가게 앞에는 주차할 곳이 없어서 차가 빽빽한 골목을 돌다가 겨우 주차에 성공했다. 가게로 가는 골목 길가에 어떤 아저씨가 쭈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주문한 피자를 가지고 차로 돌아 가는데 그 아저씨가 골목길 한가운데 대자로 누워 있었다. 차 빼는 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걱정되었다. 어둡고 좁은 길을 운전자가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아저씨를 못 보고 지나갈 것 같았다. 못 본 척 지나갈까, 깨울까 고민하다가 길 한쪽에 피자상자를 내려놓았다.


"아저씨, 여기 차 다녀서 위험해요!" 아무리 흔들어도 아저씨는 꿈쩍 하지 않았다. 두 다리를 붙잡아 끌어보고, 옆으로 굴려 보아도 허사였다. 하는 수 없이 경찰서에 전화했다. 순찰 중인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곧 가보도록 하겠단다. 기다리는 사이 골목길로 들어오는 차 몇 대를 우회시켰다. 피자는 식어가고 온다는 경찰은 오지 않아 원망스럽게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50대 중후반쯤 작업복 차림이었고 안경이 반쯤 비뚤게 벗겨져 코에 걸쳐 있었다. 녹록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삶이 엿보였다. 이 아저씨에게도 가족이 있을 텐데, 마음 따뜻해야 하는 날에 선뜻 집으로 향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어 마음이 짠해졌다.


드디어 경찰 두 명이 도착했다. 그들이 아저씨를 옮기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자를 먹던 아이들이 쌍따봉을 날려줬다. 쓰러져 있던 그를 지나칠 것인가 다가갈 것인가 고민하던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도움을 주기로 선택했다. 그냥 지나쳤으면 따뜻한 피자는 먹을 수 있겠지만, 마음속에는 찝찝함과 죄책감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날 가족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기로 말이다. 그날 이후 남편도 역시나 지나치지 않았고 한 생명을 구한 일이 있다.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일터에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아침부터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나, 사람을 살린 것 같아." 그의 첫마디였다. 남편 말에 따르면, 출근길 지하철로 가는 좁은 골목길 바닥에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이미 잿빛이었다. 늦었을까 걱정하면서도 가방을 내팽기치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1년에 한 번씩 수년간 교육받아온 터라 대강 머릿속에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119 신고를 부탁하고 여자 목의 머플러를 풀게 했다. 심장 압박을 몇 분 정도 하다 보니 여자의 얼굴색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제는 살았구나 싶어 멈추었더니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심폐소생술을 다시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혈색이 돌기 시작했고 의식을 차릴 때쯤 구급차가 도착했다. 남편은 구급대원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자리를 떴다. 온몸이 비 오듯 땀으로 젖었고, 후들거리는 다리와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지하철 대합실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출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정말 사람을 살린 것이다.


"의인 김 아빠님 퇴근하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대단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남편은 잘할 수 있을까 주저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주변에 도움을 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여자의 생사가 시급한 상황이라 용기 내어 뛰어들었다고 한다.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사람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실행할 심폐소생술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잘하지 못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그 상황에 분명 망설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은 곧바로 뛰어든 것이다. 이 일에 얼마나 큰 용기를 냈을지, 남편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다.


그 일로 나는 일터에서 일 년에 한 번 받는 심폐소생술 교육을 꽤나 진지하게 임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혹은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옆을 지나던 누군가가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인간애로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것이 오지랖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따뜻한 관심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나에게는 낯선 이들도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말이다.


크리스마스의 골목길에서, 남편의 출근길에서처럼, 누군가를 향한 한 번의 발걸음이 오늘도 누군가의 삶을 구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난 이 온기가 우리 모두를 연결하고, 결국 서로를 살리는 힘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이렇게 우리가 만들어갈 밝은 미래를 꿈꾼다.

내 지인-엄마들-이 남편에게 만들어준 깜짝 토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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