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택배를 합니다 10
쿠팡플렉스를 플렉스
눈물 반 콧물 반 반반 물 많이로 고군분투했지만 값진 경험임은 부인할 수 없는 쿠팡플렉스.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느꼈고 내손으로 번 지폐 한 장의 소중함은 부록이다. 쿠팡플렉스를 플렉스 했던 숱한 날의 꿀팁을 전해볼까 한다.
밥때와 괴리감 있는 새벽녘이지만 몸을 놀리다 보면 허기지기 마련이다. 나서기 전 간단히 고구마나 바나나하나 가볍게 뿌시면 좋다. 배불리 먹으면 무거워서 별로고 진 빠지지 않을 정도면 된다. 대신 고생하는 몸땡이를 위해 출 퇴근길 간식 까먹는 시간을 선물한다. 모태 빵순이에게 주전부리는 사랑이라 음악이 흐르는 달콤한 출근길은 좋은 기합이 된다.
셀렉에도 노하우가 있다. 부스러기가 생기는 종류는 내부세차 때 머리 쥐어뜯게 되니 이왕이면 깔끔한 게 좋다. 넛츠바 에너지바, 한입에 들어가는 젤리류나 코팅된 초콜릿이 좋다. 음료부로 넘어가자. 달달한 건 되려 갈증을 불러오기에 지양한다. 카페인도 좋지만 일찍 마셔버리면 하루 세잔이 넘어가기에 500ml 페트 헛개, 보리, 옥수수수염 따위 차류를 쟁였다 하나씩 챙기는 것을 추천한다. 그럼 커피도 덜 마시고 수분 섭취도 되니 좋다. 알바 때 먹을 간식거리 쇼핑도 소소한 낙일지니 작은 것에 행복을 구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장비로 넘어가 보자. 뼈저리게 느낀 건 장갑의 중요성이다. 내손에 딱 맞는 착용감 좋은 손이 있어야 일하기 수월했다. (다이소 3M 파랭이 장갑 사랑합니다) 너무 두꺼운 건 답답했고 너무 얇은 건 금세 솔기가 터져 대걸레가 되니 주의하시라. 복장은 두말하면 입 아프지만 최대치로 편한 게 좋다. 쉼 없이 움직여야 하니 통 넓은 트레이닝 복에 소금기에 젖어도 아깝지 않을 상의가 좋다.
우산이 무용지물인 배송인들에게 우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 올여름엔 유난히 비가 와서 우비느님이 귀인이었다. 크로스가 가능하도록 끈 달린 휴대폰 케이스는 내 영혼의 단짝. 없으면 불편하기 그지없어 유턴까지 감행했었다. 마스터키는 미리 발급받아두고 차 안에 물병을 배치하고 (목말라 타 죽을 것 같아야 오지만) 발이 되어줄 튼튼한 수레가 있다면(로켓 프레시 백이 12개 실리는 폭넓은 전차로) 천군만마 완성이다. 크록스는 비가 흩뿌리는 날 자주 이용했는데 짭록스는 바닥이 미끄러워 잘못 디디다 이승을 하직할 뻔했다. 꼭 정품으로 사시길 추천하는 바다.
그리고 다음 안건은 엘리베이터 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이다. 물건이 많아 짬이 안 날 땐 엄두 못 내지만 몇 개 없는 라인을 오를 때면 시간 고 녀석이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소중한 시간을 단 1초도 흘려선 안돼! 에라이 운동이라도 해야지, 기특한 생각이 절로 드는 신통방통 알바. 스트레칭했다 춤을 췄다 택배상자 아령 삼아 데드 리프트 했다 오늘의 식단이 있는 중석식 모니터 보며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는 아파트였다)
박비서, 오늘은 오므라이스에 계란국으로 하지.
입주민 놀이를 마치면 어느새 1층에 도달한다. 때때로 새벽 비행기 타러 캐리어 끄는 금슬 좋은 커플에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거울에 비치는 여행객과 일꾼의 상이한 풍경이 자격지심에 불을 지펴도 1평 남짓한 그 공간에서 참 많은 것을 했다. 나는 거기에서도 꿈을 꿨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먼지 가득한 모자와 장갑을 끼고 등에는 촉촉이 땀이 배어와도 어느 때보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생의 치열한 한가운데에서 졸린 눈을 부비며 아들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란 전화를 하며 너 참 열심히 산다 앞으로도 우리 잘해보자 두 주먹 불끈 힘이 빡 들어갔다.
스스로에게 당당하면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을 알려준 귀한 인연. 이 진리를 인지하고 나니 고된 시련도 전보다 가볍게 털어버리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 데미지에 강해지도록 업그레이드되어 나는 서서히 진짜 어른이 되었다. 물론 꾸준히 주눅 눈물 근육통 피로감 등등을 선사했지만 뒤돌아 보면 인생은 참 공평할 때가 있다. 선물 같은 기똥찬 순간 역시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사위가 달아올라 고개를 들면 일몰인지 헷갈릴 핑크색 보라색 일출의 향연이다. 실화야? CG야 뭐야? 입을 떡 벌리고 바쁜와중에도 잠시 걸음을 멈춘다.
많은 이들이 꿈을 걷고 있을 시간, 홀로 깨어 동과 동 사이 태양의 곡예를 관망하는 사치를 누려야 하기에. 진짜 몰랐는데 우리나라에 이런 세상이 있다. 괌 하와이 사이판보다 기깔나는 코리아의 맛. 도도하게 보는 이가 없어야 허락하는 건지 혼자 보기 아깝게 아름답다.
달이 하루하루 차오르고 또 베어 먹는 시간들. 그리고 해에게 다시 시간을 건네주는 찰나들. 촘촘히 박혀 있던 별이 착각인 듯 내게로 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날들이 참 좋았다. 괜히 입 밖으로 너무 예쁘다를 터트리며 하루의 진짜 냄새를 맡는다. 밤, 새벽, 아침으로 적나라히 뒤바뀌는 세상의 속살 1열 직관은 택배 알바에게 꽤 호사스러운 옵션이었고, 어떤 상여금보다 만족감이 높았다 자부한다. 쿠팡플렉스는 가지각색 장애물이 산재했지만 그것만 넘어서면 인간으로서 격렬히 박동하는 순간을 플렉스 해줬다.
이렇게 난 이혼 후 택배를 하며 새로운 출발선을 얻었다. 목적지는 모르지만 하나는 안다. 그저 열심히 달리다 보면 차근차근 해결하는 스스로가 기다리고 있으리란 걸. 아무짝에 근거도 없는 자신감이지만 의지할 데라곤 척추기립근과 어제보다 믿음직한 나뿐인데 어쩌랴. 승모근 세우고 손아귀 바짝 힘주고 손수레 힘차게 밀며 니나노 노 저을 밖에.
키를 잃고 섬처럼 우두커니 표류하던 한 척의 배가 드디어 출사표를 던졌다. 멀리 갈매기떼 갤러리의 환호가 들리는 듯하다. 거북선 사이즈의 포부만 실은 통통배 소소호. 그래도 작은 게 맵다고 위풍당당 저만치 멀어졌다. 하얗게 펄럭이는 닻의 춤사위를 지켜보던 바다가 웃는다. 쪼꼬만 게 우습다고 킥킥 일렁이더니 저만치 더 가보라며 슬쩍 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