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 지루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여행 떠나길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주변의 풍경을 관찰하면서 저는 일상이 새로워졌습니다. 길가에 피어있는 나팔꽃에 시선이 가 한참을 바라보고 화단에 피어있는 무궁화를 유심히 살펴보며 꽃들의 모양과 색상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걸 발견하곤 신기해하기도 합니다.
저녁을 지으면서 바라보는 해 질 녘의 하늘도 매일매일 달라지고 구름과 노을도같은 모습이 없이 매일 다른 색과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어느 날인가, 동네를 산책하는데 지나는 길에 늘 서 있는 전봇대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전봇대가 저렇게 생겼구나, 전깃줄이 늘어져 있고 전선을 잇는 장치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구나, 자세히 바라보면서 전봇대가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네 전봇대 드로잉
그래서 전봇대를 드로잉해 보았습니다. 어떤 전봇대에는 길 표지판이 붙어 있고 다른 전봇대에는 스피커가 붙어 있습니다. 주민센터 앞 전봇대에는 가로등이 붙어 있고 주택가에 있는 전봇대에는 가느다란 전선 두 줄만 감겨 있습니다. 전선줄도 굵기가 제각각이어서 어떤 것은 굵고 어떤 것은 얇습니다.
전봇대가 놓여 있는 위치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져 전기만 공급해 주는 게 아니라 길잡이 역할도 하고 동네 소식도 전하고 어두운 길을 밝혀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시계획에 따라 만들어지는 신도시에서는 지중화 작업으로 전봇대를 세우지 않습니다. 기술이 발달하면 옛 것은 낡았거나 지저분하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하대 받기 일쑤입니다. 전봇대도 그런 상황이 된 거 같습니다.
전봇대가 처음 세워질 때만 해도 전봇대는신문물로 대우받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젠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아마도 언젠가는 전봇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봇대의 표정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마을에 서 있는 전봇대가 무성해진 여름 나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치 초록색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서 방향으로 전깃줄을 잔뜩 매달고 위쪽으로도 전선을 한없이 뻗어가고 있습니다.
전봇대에 휘감겨있는 전선줄들이 집집마다 찾아가 밤을 밝혀 주고 냉장고를 돌아가게 하고 온갖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게 해 줄 겁니다. 전봇대를 드로잉 하면서 전기를 쓸 수 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고마운 일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살아가는 일상은 평범해서, 그저 일상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런 똑같은 하루하루고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당연한 듯 생각되지만 당연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의 사물을 자세히 바라보고 관찰해 보니 그저 그런 일상이 아니란 걸 발견하게 됩니다. 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이 우리에게 주는 고마움, 우리를 둘러싼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것들이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일상을 관찰하며 살아가는 일, 일상을 자세히 바라보는 일은 깨어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깨어있는 삶 속에서 일상은 새로워집니다. 그래서일상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은 마치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선하고 새롭고 마음이 밝아지기 때문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