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서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거대한 파도는 당장이라도 배를 집어삼킬 듯하다. 거세게 몰려오는 파도의 하얀 포말은 악마의 손길처럼 사공들을 낚아챌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인다. 거대한 힘과 압도적인 공포가 스며있는 찰나의 순간이다. 백척간두에 서 있는 사공들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지옥의 입구로부터 벗어나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것만 같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한 이 그림은 일본 에도시대에 살았던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가 그린 <후카쿠 36경> 중 첫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제목은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로 우키요에라 불리는 채색 목판화 그림이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화로 주로 목판화 형태로 제작하고 대량 생산되어 일반 대중들도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그림이다. 색채감이 강렬하고 형태는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선 표현이 특징이다. 일본의 우키요에는 서구 세계로 넘어가 모네, 고흐,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와 같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전통적인 우키요에 기법인 단순성과 평면성, 장식성에 더해 유럽에서 들어온 원근법을 이용해 이 그림을 구성했다. 우키요에의 평면성은 호쿠사이를 통해 입체성을 띠게 되고 서양에서 들여온 프러시안 블루 안료는 그림에 독특한 색채감을 주었다. 호쿠사이의 과감한 시도 덕분에 탄생된 이 작품은 감상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컬러링을 하려고 책장에 꽂혀있는 명화 컬러테라피북을 꺼냈다가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색감은 단순한데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림이어서 그 강렬한 느낌을 채색하고 싶었다. 수채화로 그리기에는 종이가 얇아 색연필로 표현해 보기로 했다. 72색 색연필로도 원본이 가지고 있는 색을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없어서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 색을 입혔다.
파버 카스텔 유채색연필로 표현한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후지산을 감싸고 있는 낮은 하늘은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으로 어둡고 불안하고 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서 진하고 연한 여러 개의 보라색과 인디고 블루, 그레이를 섞어 어둡고 음울한 현재의 기운과 알 수 없는 미래의 분위기를 표현해 보았다. 높은 하늘은 폭풍이 몰아치는 늦은 오후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차분한 옐로 톤으로 칠해 뱃사람들이 거대한 파도를 뚫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저 멀리 그림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눈 덮인 후지산은 작게 그려져 있다. 원경이라 작기는 하지만 뚜렷한 기상이 느껴진다. 우뚝 솟은 모습은 위엄이 있으며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이 모아진 산의 위용은 신성함이 감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자연은 가혹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후지산에서 느끼는 신성함과 장엄함으로 사공들은 자연에게서 희망과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나는 호쿠사이의 이 그림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무자비와 자비, 절망과 희망, 가혹함과 인자함을 본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는 평화롭고 잔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광폭해져서 순식간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그림을 보고 채색을 하면서 우리가 사는 인생은 망망대해인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출발하면서 우리는 목적지를 만들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나름의 노력을 하며 노를 저어 간다.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 보면 다양한 얼굴의 바다를 만나게 된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바다를 만나기도 하고 어렵긴 하지만 극복할 수 있는 작은 파도를 만나기도 한다. 어느 때는 몸과 마음이 긴장할 정도의 거센 파도를 만나 몸과 마음의 힘을 모두 써버려 탈진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파도를 만나며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해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을 만나 연대감을 느끼기도 하고 가족을 만들어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경유지가 된 그곳에서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바다로 나아간다. 어느 때는 혼자서 배를 타기도 하고 어느 때는 여럿이 항해를 하기도 한다.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여럿이 탄 배 안에서 우리는 행복감과 불안감, 우월감과 열등감, 연대감과 배신감 등을 느끼며 때론 울고 웃고 때론 분노하고 우울해하며 항해를 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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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우리는 언젠가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대항할 수 없고 극복하기 어려운 무섭고도 거대한 파도를 만난다. 집채만 한 파도가 바로 눈앞에 있으면 두려울 것이다. 금방이라도 덮쳐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몰려오면 오금이 저릴 것이다. 파도와 파도가 부딪쳐 내는 소리와 거세게 몰려오는 폭풍은 스산하고 공포스러울 것이다.
대항할 수조차 없는 거센 파도를 만났을 때 나는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그 상황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 받아들임 이후에 무엇이 올지 알 수 없지만 그 결과조차도 자연의 섭리라고, 순리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거센 파도를 담대하게 혹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면 작은 파도를 견디는 마음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마음의 파도들, 움츠림이나 우울함, 불안감이나 두려움 같은 것들은 큰 파도를 받아들인 용기와 담대함으로 수그러들 것이다. 그것들이 없어진 마음에는 잔잔하게 고요한 바다가 들어올 것이다. 그래서 웬만한 파도에는 흔들리지 않는 여유를 갖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2023년이 시작되는 새해 아침, 올 한 해에도 우리에게 다가올 수없이 많은 파도들을 용기와 담대함으로 맞이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