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
며칠 전 뮤지컬 <킹아더>를 보고 왔다. 좋아하는 배우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사전 지식도 없이 그냥 팬심으로 공연장을 찾아가 객석에 앉았다. 엑스칼리버의 검을 뽑고 왕이 되었다던 전설 속의 인물 ‘아더’, 그리고 아더의 곁에서 충성을 다짐하는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라니…. 어렸을 때 남아들이 칼싸움을 하면서 놀던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나기도 했다. 막이 오르자마자 아름답게 빛나는 무대 조명, 그리고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프랑스 뮤지컬 특유의 몽환적인 음악적, 시각적 요소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나를 더 빠져들게 하는 것은 극 초반과는 다르게 급격히 성장하는 아더의 모습이었다.
아더 왕은 6세기경 영국의 전설적인 인물로 유럽에서는 예수 다음으로 자주 회자되는 인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더가 처음부터 위엄 있고 존경받는 왕은 아니었다. 우서 왕의 아들이지만 그의 태생은 평범치 않았고, 그는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 손에 길러지며 평범한 목동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아더는 엑스칼리버의 검을 뽑게 되면서 브리튼의 왕이 됐다. 갑자기 찾아온 뜻밖의 운명에 나약한 한 사람이었던 아더는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이웃 나라의 침략과 가난에 백성들이 눈앞에서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주위에는 그에 대한 복수로 가득 찬 인물이 둘이나 있었다. 엑스칼리버는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더의 출현으로 왕위를 얻지 못하는 멜라아강은 호시탐탐 그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아더와 아버지가 다른 남매 지간인 마녀, 모르간 역시 아더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그의 인생은 왜 그리 고난의 첩첩산중인지, 사랑하던 아내 귀네비어가 아더의 충신 랜슬롯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 무슨 난리 부르스인가 싶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있는 등장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나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용서와 강인한 마음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외로운 리더의 자리에 서서 주변의 방해와 배신을 모두 견뎌가며 왕의 자격을 갖추려고 애쓰는 아더의 삶은 참 안타까웠다. 아더는 자신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멜라아강과 모르간, 그리고 그를 배신한 귀네비어와 랜슬롯을 모두 용서한다. 그리고 자신은 오로지 나라와 백성만을 위할 것을 맹세하며 노래한다.
다시 일어나는 거야.
나의 과거는 다 버려!
다시 새롭게 시작해.
너를 위해, 나만의 널 위해.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아마도 이런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싶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역경 속에서도 분명히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결심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성장해가는 아더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했던 왕위에 오르는 것은 아더에게 정해진 운명이었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훌륭한 왕이 되는 건 그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공연을 보고 벅찬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오던 길, 무대 위 장면이 오래전 전설 속 인물의 이야기이니 우리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치부하기에는 아쉬웠다. 그래서 이야기의 스케일을 줄여서 무대 위의 배우들의 삶에 빗대어 보았다. 신이 내린 아름다운 목소리를 선물 받은 뮤지컬 배우들, 노래를 잘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타고난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객들의 마음을 살려내는 멋진 배우가 된 것은 그들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다. 매 회차 라이브로 3시간 가까이 공연을 해내야 하는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매력적인 목소리를 선물 받았다고 감히 도전하기에는 쉽지 않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떨리는 마음을 이겨내고 그들은 배우의 길을 걷겠다 결심했다. 그리고 실수 없는 무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연습하고 애쓰는 그들의 시간이 모여 관객들에게 큰 감동과 선물로 다가왔다.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은 물론이고 관객들의 마음까지 살려내는 그들은 이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는 무대의 스케일을 더 많이 줄여서 평범한 나의 삶에 빗대어 보았다.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뽑을 수 있는 검은 없을까?
내 마음속에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뽑을 수 있는 엑스칼리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잠시 해보았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뽑아줄 수 없는 나만의 검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지금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은 아닐까? 선택의 순간마다 수없이 흔들리고 고민하며 선뜻 검을 뽑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망설이는 나에게 오늘 무대의 막이 내리기 전 아더 왕이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인간의 알 수 없는 수많은 선택,
그것이 인간의 형벌이자 권리이다.
선택의 순간이 되면 이게 과연 최선일지 확신이 서지 않아 두렵고 괴로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고민하고 주저하기보다는 과감한 선택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결과가 만족스러울 수 있도록 현재에 충실하며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할 일이다.
머뭇거리지 말고 내 가슴속의 엑스칼리버를 뽑아야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늠름하고 기품 있는 자태를 뽐내는 카라 꽃을 심어주고 싶다.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 때문에 호불호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카라는 긍정적인 꽃말도 참 많이 가지고 있다. 순수, 열정, 환희, 천년의 사랑 등 가슴속에 품고 싶은 좋은 뜻은 다 가지고 있다. 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나의 미래에 열정과 환희를 한껏 불어넣어 주는 마음으로 검을 뽑은 자리에 카라 한 송이를 꽂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