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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o Jan 07. 2022

추상적인 인간의 표준 도량형

문과형 인간의 고충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뼛속까지 문과형 인간인 '골수 문돌이'이다. ('문순이'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언어를 습득한다거나 단어를 조합해서 무언가를 표현해 내는 일은 비교적 수월하게 해내고 역사나 문화에 관심이 많다. 문학을 이해하는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암기도 어렵지 않지만 거기에 숫자가 포함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똑같은 암기임에도 숫자가 등장하면 거부반응이 생기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우리 집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나 혼자만 양력 생일을 썼는데, 그야말로 다행이었지 않은가. 난 내 음력 생일을 도저히 외울 수가 없었거든.

거기에 공간 감각과 방향 감각도 기괴할 정도로 엉망이고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길치이기도 한데, 이는 보통 사람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에 대해 다음에 말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 하도록 하겠다. 얘기가 길어지거니와 좀... 부끄러우니까. 요는, 난 단순히 문과형 인간인 것뿐이 아니라 이과적인 부분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 극단적인 문순이라는 것이다.


대문을 열기도 전에 집 밖에까지 문과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큰언니는 이과형 인간이다. 수학을 전공했고 (우리는 항상 산수 공부하냐고 놀렸지만) 학창 시절에도 물리나 화학 등 나는 생각하기도 싫은 과목들을 고루고루 잘했다. 남들은 서클 활동으로 연극을 하거나 노래를 하며 혼돈의 미성숙한 청춘을 불사를 때에 큰언니는 생물반에 들어가 포르말린 냄새를 풍기는 흰 가운을 입고 갓 해부한 동물들의 장기를 엄숙하게 공책에 그렸다. 명문 대학의 수학과 재학생이었기에 과외 건수가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언니는 가난한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대학 초년생 시절에도 용돈을 풍족하게 썼다.

언니의 집 책꽂이엔 아직도 정석이 꽂혀 있는데, 놀랍게도 언니는 그것을 종종 들여다본다. 마음이 안정된다나 어쨌다나. 난 표지를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심히 어지럽혀지는데.


그런 언니의 세계는 숫자로 체계화가 되어 있어서 추상적인 표현에서 결론을 도출해 내야 할 때에는 심란해지는 모양이었다. 언니는 요리를 참 못했는데 (지금도 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라면 하나를 끓여도 맛이 지지리도 없었다. 그래도 그 학구열은 어디 간 것이 아니어서 열심히 배우려고 들었는데, 나나 엄마가 하는 말들을 빼곡히 받아 적거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해댔다.

그런데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으니, 가령 고등어조림을 할 때 내가 하는 모양을 눈에 새길 세라 열심히 쳐다보다가 언니가 묻는다.

"무는 어느 정도로 썰어?"    

"숭덩숭덩."

"몇 센티 정도로?"

"요... 요만큼?" (손가락으로 두께를 가늠해 보여준다)

난 최대한의 정보를 담아 알려 주었는데, 언니에게는 영 와닿지가 않는다. 기어이 엄마 반짇고리를 뒤져 줄자를 꺼내오고 냄비에서 양념이 묻은 무 조각을 꺼내 두께를 재어야 납득이 되는 모양이다. 숫자로 환산된 정보를 끄적끄적 적다가 또 질문을 한다.

"고춧가루는 얼마나 넣어?"

"적당히"

"적당히가 얼만큼인데. 밥숟가락 기준으로 말해봐."

그런 걸로 재어서 양념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당연히 모른다. 고등어를 몇 마리 조리는지, 큰 놈인지 작은 놈인지에 따라 다르고 무를 많이 넣는지 조금 넣고 말 건지에 따라 다르다. 적당히 넣었다가 색깔이나 농도가 맘에 들지 않으면 더 넣는다, 그것이 나의 계량 방법이고 불행히도 엄마에게도 그랬다. 언니는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허술한 계량 기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했고 고등어조림은 시도조차 못했다. (내 생각인데 아마 아직까지도 못 해봤을 것이다)


언니가 결혼을 하고 집을 얻어 신혼살림 준비를 하면서 나에게 의기양양하게 주방을 공개했는데,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주방에는 저울과 계량스푼, 계량컵 등이 빼곡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난 요리 프로를 진행하는 요리사들이나 그런 걸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저런 걸 갖춰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런데 언니가 그런 걸 가지고 있어 보았자 정작 나는 언니의 언어로 알려 줄 수가 없는데 어쩌나. 내 요리를 좋아하는 언니는 역시나 내가 한 음식이 입에 맞아하는 형부를 위해 꼭 내 레시피로 요리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인터넷에 있는 레시피로 요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언니에게 구세주가 등장하였으니 바로 백 선생님 되시겠다. 난 TV를 보지 않고 백종원 님이 요리하는 영상을 본 적도 없어서 정확히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언니 말로는 정확한 계량 방법을 알려 주고 가장 쉽게, 가장 무난하게 맛있는 방법으로 요리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고 했다.

언니의 집 냉장고는 어느새 백느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종이쪽지가 마치 현상수배 사진이 붙어 있는 경찰서 벽 마냥 빽빽이 자석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백느님을 방송에서 영접하고 나면 언니는 부리나케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그렇게 해서 형부의 기나긴 암흑시대는 끝이 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잘 모르겠다. 확인해볼 기회가 없어서.


의사소통 방법의 차이로 고난을 겪은 것은 언니뿐만이 아니어서 종종 그 반대의 경우로 나에게 적용되곤 했다. 말했다시피 난 심각한 수준의 길치인데, 이런 경우가 있었다.

언니가 이사를 한 뒤, 나에게 주소를 알려주고 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어느 역에서 내리라는 것까지는 수행을 해 냈는데 그 이후가 문제이다. 난 지도 앱을 보면서도 길을 못 찾기 때문에.

결국 핸드폰을 뒤집었다 360도로 삥 돌아보았다가 별 수를 다 쓰다가 결국 언니에게 전화를 하는데,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 슈퍼 있지?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

"슈퍼를 오른쪽으로 둬야 해 아님 왼쪽으로 둬야 해?"

"슈퍼를 왼쪽으로 두면 그게 큰길이지 골목이냐 멍청아." (내 눈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골목으로 들어왔어. 얼마나 가야 해?"

"200미터쯤 걸어와."

"200미터가 얼마나 걸으면 나오는 거리야?"

이런 대화와 고성이 오가다가 결국 나는 새로운 공간에 떨어져 길을 잃고, 꼼짝 말고 그곳에 있으라는 일갈을 들은 뒤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형부를 발견하는 결론으로 끝을 보기 마련이었다.


이렇게나 숫자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나이지만, 가끔 언니의 수치화된 세계가 부럽기도 하다. 가령 남에게 내 욕구나 상태를 설명하려고 할 때 간결하고 정확하게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

"난 지금 4만큼 배가 고파. (4라는 숫자에는 약간 출출하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할 만큼 배가 고프지는 않다는 정도로 합의가 된 상태이다.) 그러니 국밥 말고 커피에 케이크나 먹었으면 하는데."

"그래 좋아. 지금 내가 6만큼 피곤한 상태여서 국밥을 먹게 되면 식곤증이 몰려와 8만큼 피곤해질테고, 일하다가 졸게 될 테니까. 커피하고 케이크 괜찮은데."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남을 이해시키는 용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데에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면 더 혼란스럽기 마련이니까. 별 일 아닌데 과장해서 생각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죽을 만큼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그것이 아니라 7만큼 불안하고 4만큼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라고 알 수 있다면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자신은 상대에게 7만큼의 호감을 느끼고 3만큼 그 사람을 동경하며 5만큼 절박함을 느끼는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파악한다면 멍청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진정하고 제대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음. 내 생각에 나는 지금 8만큼 한심하고 6만큼 화가 나 있으며 3만큼 슬프고 5만큼 우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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