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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Mar 20. 2024

백희나와 메탈리카

백희나 <어제저녁>

고민스러울까?

히트작이 많은 백희나 작가를 얘기하면서 어떤 작품을 선택하여도 기본 이상일 것이란 건 누구나 수긍할 만하다. 그럼에도 글을 써 보고자 했을 때 일말의 고민도 없이 <어제저녁>이 바로 떠올랐다. 이 글은 그런 자연스럽게 손이 가던 느낌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로서는 2012년 작 <장수탕 선녀님>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했다.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까무러치게 재미있다. 그 정형적이지 않은 여러 캐릭터들의 형태, 디테일, 따뜻한 이야기들이 어우러져 일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정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인형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딸과 나는 항상 마지막 덕지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씬을, 꼭 그렇게 생뚱맞은 표정과 포즈를 함께 취해준 연후에야 그림책 읽기를 마치곤 했다.

첫 번째 그림책이 즐거우니 다른 책도 하나씩 손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한 권씩 한 권씩 사 보며 그녀가 손으로 직접 느리게 다듬어 나간 세계를 지지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구름빵> 저작권과 관련되어 작가가 입었을 마음고생과, 그럼에도 계속 창작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끈기를 향한 격려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어제저녁>은 이 싸움으로 인해 작가가 6년 동안 창작활동에는 힘을 쏟지 못하다가 자신이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 심기일전하여 발매한 세 번째 창작 그림책이다.

저자의 약력에 ‘인형장난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듯이, 백희나 작가의 장기라고 한다면 직접 만든 인형과 소품들을 사용해 현실 같지 않은 세계로 현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부분일 것이다. <어제저녁>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다양한 인형들이 무더기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들이 한 아파트에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좌충우돌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엄청 재미있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지만 그게 좀 달랐다. 사실 첫인상은 좀 황당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장수탕 선녀님>같이 잘 차려 놓은 성찬을 기대하고 책장을 넘겼는데 전혀 다른 느낌이 엄습했으니 말이다.

첫인상은 말하자면 엄청 심심했다. 심지어 무언가 건조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인형들은 차별화된 각자의 개성은 넘쳐흐르되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분명 행복한 씬인데 표정에는 그것이 그닥 드러나지 않는다. 슬픈 것 같은데 무표정에 오히려 가깝다. 또한 기저에 흐르는 이야기들은 모두 ‘했다’, ‘날아올랐다’, ‘컸다’ 등 모두 ‘~다’로 끝나며 상황을 무심히 설명하는 듯 나레이션으로 전달된다.

‘이 분위기 무엇? 작가가 지난 싸움으로 마음이 많이 건조해진 건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반전은 아이로부터 나왔다. 아이가 그녀의 다른 책들보다도 이 책을 훨씬 많이 선택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아이는 반복을 좋아한다. 몇 번이고 아이에게 읽혀 주며 나도 반복적으로 읽어나가다 보니 슬금슬금 독특한 느낌이 살아났다. 처음에는 몰랐던 묘한 매력이 하나하나 발견되었다.

혹시 '발도르프 인형'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헝겊으로 만든 수공예 인형 말이다. 표정이라고는 점 두 개 정도 찍어 놓은 정도의 무표정의 인형이 대부분인데, 이는 아이들에게 상상력의 기회를 최대한 줄 수 있는 교육철학이 반영된 형태라고 한다.

이제는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어제저녁>은 마치 발도르프 인형 같은 그림책이다.



<어제저녁>은 한 아파트의 여러 주민들이 어떤 저녁에 벌어지는 작은 사건을 통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유쾌하게 보여준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등장하는 인형들의 표정은 앞서 얘기했듯 나레이션과는 다르게 최소화되어 있다. 대신 그 인형의 숨은 표정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있는 내가 느껴진다.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개 부부는 성질은 급하지만 금술은 좋은 것처럼 보이고, 얼룩말은 붉은 목도리를 두른 패션 감각과 날씬함으로 센스가 넘쳐흐른다. 상극인 여우가 산양네 집으로 저녁 식사 초대를 간 것을 보아하니 이 여우는 마음이 여린 게 틀림없다. 조심성이 많은 생쥐부인은 밖으로 나가는 대범함도 가지고 있으니 모험심이 몸에 자연스레 배어있는 듯하다.

이런 심경을 확실하게 완성시켜 주는 것이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표이다. ‘유쾌한 아파트 주민들’이라고 등장인형들에 대해 하나씩 짧은 역사와 배경을 기술해 놓았다.

그제서야 나는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 그림책은 상상하게 만드는 책이구나. 최소한도의 배경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 결말이란 걸 따로 만들지 않은 열린 책이구나.’  따라서 아이와 읽는 본 작품은 마지막 등장인물표까지 모두 읽어 내려간 연후에 책 읽기가 완성된다.

책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각 인형들이 풍기는 분위기를 각자의 마음에 들인 조각으로 형상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작은 연결고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작은 하나의 움직임이 서로에게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는 또 다른 해프닝 말이다. 예를 들어 꿈 많은 얼룩말 소녀와, 눈길을 뚫고 초콜릿 삼단 케이크를 배달하는 신실한 청년 까망 고양이는 왠지 멀지 않은 장래에 썸씽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맨 마지막 캐릭터 자리는 공란으로 비워 둔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또 다른 캐릭터가 등장할 것이고, 혹은 각자가 새로운 캐릭터를 탄생시켜 이 유쾌한 아파트로 이사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어제저녁’이라고 제목을 정한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다음 작품은 ‘오늘 저녁’으로 칭하면 어떨까? 그리고 3편은 아마 ‘내일 저녁’? 4편은 ‘겨울 저녁’도 좋겠다.


누구에게나 첫인상이 친절하지 않아 자신의 마음에 들이지 못한 많은 작품들이 있다. 한번 보고 ‘뭐야’ 그러며 재껴 놓았을지도 모르는 작품들이 나 또한 많다. 떠 먹여주는 작품과 다르게 이런 류들은 좀 더 능동적인 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면 귀찮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번 인이 박히기 시작하면 몸 안에서 좀처럼 나가지 않는 작품들이 이런 존재들 속에서 탄생하곤 한다.

아마 여러분들도 당장 생각이 날 것이다. ‘아, 처음엔 별거 없다가 어느 날 유독 가슴으로 다가왔던 나만의 편견 가득한 작품이 있었지!'라고 말이다.

그리고 난 그런 편견을 매우 지지하는 편이다.




<별책부록>

그렇게 글을 마무리하자면 반드시 떠오르는 앨범이 있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Metallica 메탈리카의 4집 […And Justic for All]의 경험이 그러하다.

본 작품을 듣기 전에는 천하의 3집 [Master Of Puppets]에 미쳐서는 트래쉬 메틀의 매력에 제대로 빠지고 있던 터였다. 그 마음을 이어받아 용돈을 아껴 4집을 사 오던 그 흥분된 홍조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급한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을 때, 그만큼의 생경한 풍경에 당혹해했던 마음도 또렷하다.

이게 뭐지? 뭐 그런 느낌이었다. 3집이 풍성하고 너르게 안아주는 음악이었다면 4집은 바싹 마른 사막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플레이까지는 여전히 의혹으로 가득 찬 마음이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플레이가 되었을 때 조금씩 달라져가는 심정의 변화가 있었다. 그 건조한 사막의 바람을 비집고 올라오는 다른 종류의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는 예상하는 바와 같다. 최고의 트래쉬 메탈 앨범을 거론하면 한두 손가락에 꼽히는 3집 [Master of Puppets]와 비교했을 때, 여지없이 4집 […And Justice for All]에 주저 없이 손을 들어주는 내가 있다. 아마 많은 분들이 3집을 더 좋아하겠지만, 그 모래바람 섞인 사운드는 홀로 섬에 들고 가고 싶을 만큼 매력이 있다.

그런 경험을 소환하여 별책 부록은 그래서 이렇게….


아무리 그래도 백희나 작가의 글에 Metallica는 너무하지 않나?



시끄러운 음악입니다.

Metallica […And Justice for All] 1988년 <Harvester of Sorrow>

https://youtu.be/kl1Qi-qIp0k?si=jjnNslb0Hx59gR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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