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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Mar 27. 2024

여긴 화를 내는 어른이 없어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버지니아 리 버튼/홍연미 옮김

여기 브런치 작가님들은 어떻게 글을 쓸까? 아마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반드시 읽는다는 전제하에서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가 본다는 가정에서 쓰다 보니 머릿속에서 자기 검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일전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 부정적인 면일 것이다. 혹은, 독자들이 있다는 것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불러일으킨다. 충실한 내용을 고민하고, 내어놓는 표현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여러 문장들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에게는  명에게 읽혀야 성이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한 명에게라도 스미도록 한다면 편안해하실 분도 계실 것이다. 개인적으로 글쓰기는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창구가 되어주기 때문에 독자수에는 연연하지 않을  같으나,  한 명이라도 공감하는 이가 있다면 감사한 마음을 가질  같다.

그리고 이번 글의 작가는 ‘   독자를 가정하고 그림책을 만들었다.

 

 

기관차 치치는 ‘말괄량이라는 꾸밈음이 앞에 붙어 있듯이  나이 때의 말썽꾸러기 아이들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도시를 오고 가며 화물을 배달하는 자신의 일이 너무나도 지루해지던 어느 , 기관차 치치는 다른 어른들의 가이드 없이 자기 혼자 달려보기로 한다. 혼자서 쌩쌩 달리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자신을 멋지게 바라보겠지라는 아이다운 중요한 이유 하나 만으로.

그리고   소동은 예상할  있을  같다.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갖은 난장판으로 소란을 만들어 놓게 된다. 결국에는 자신의 속도조차 제어하지 못하게  치치. 마침내 사용하지 않던 어두침침한 숲 속의 괘도 쪽으로 길을 읽고 만다. 배가 고파 얕은 칙칙폭폭은 점점     사그라드는데….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1937 발간이 되었다. 매우 오래된 책이다. 모든 그림은 컬러가 아니라 콩테로 스케치한 흑백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소개를 보면 만화책만 너무 열중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만든 그림책이라고 한다. 바로  페이지에 ‘나의 아들 아리스에게’라고 못을 박아 놓고 있다. 첫 번째 그림책을 만들었지만 아들에게 기세 좋게 외면, 이후 절치부심 만화적인 요소까지 고심하여 만들어   두 번째 작품은 비로소 아들이 반응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첫 번째 독자의 관심은 세월을 건너 많은 독자층으로 확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 그런데 만화책을 미칠 듯이 좋아하는 저로서는 약간 납득이….)

그림책이   명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우린 아들의 성향을 유추해   있다. 먼저 아이는 기관차 모형을 가지고 놀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남자아이라면 으레 관심을 가지는 모든  것에 집중하였을  같다. 혼자서 레일을, 도로를 씨웅쒸웅 하며 달려 나가다 떨어지고 부딪치는 역할 놀이들 말이다. 하늘도 날아야   같은데  당시는 아직 비행 장난감이 없었을라나? 아이의 넘치는 에너지는 감당이 안되었을 것이고, 과장이 넘치는 그림체가 가득한 만화책으로의 이동은 당연한 수순이겠다.


그와 더불어  명의 독자를 위한 엄마의 고민도 펼쳐진다.

그림책에도 눈을 돌리게 하려면 만화적인 호흡을 위해 역동적인 컷과 과감한 강조, 생동감 있게 뿜어져 나오는 증기 긴장감 있게 그려줘야  것이다. 칙칙폭폭의 운율을 어떻게 하면   다채롭고 속도감을 부여해 줄까 싶다. 읽었을  착착 감기는 운율도 고민하게 된다.  면을  채우는 광각으로 기차의 속도감을 내어보는 것은 어떨까? 기차가 코너를 돌아나갈 때는 글자배열도 커브로 배열해 보자. 이런 아이의 눈높이에  작가의 여러 가지 의도가 드러나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아들이 흥미진진해할 요소를 고민하여 데생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네 살 이상 되는 남자아이는 좋아할 만한 그림책일라나?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더욱 끌릴만한 책일지도.

물론 그런 표면적인 이유로  지면에서 그림책을 언급했을 리는 없다. [뺏어 읽는 그림책] 연재하는 목적이 아이에게 유익한 그림책을 추천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의 시각에서 받았던 그림책의 느낌을 나누고자 시작한 컨셉이기 때문에 내가 느꼈던 무언가가 필요하다.

 

 

작가도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 그림책을 만들었을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아들에게 읽히기 위한 그림책이 단순한 만화책의 대용을 위한 목적은 아니었을 터이니 말이다. 아마 작가는 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간접적인 표현법으로 은근하게 담아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평생에 걸쳐 간직할  있는  하나의 사랑을 기저에 깔아놓고 싶지 않았을까 말이다.

그리고  부모인 작가가   명의 독자에게 넌지시 들려주려던 마음을,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공명했던  같다.

 

첫째,  그림책에는 듬직한 어른들이 등장한다.

특히, 치치를 평소에 돌보아주는  명의 어른은  면에  명씩 멋지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는 공을 들여 설명을 하고 있다. 치치를  기관차처럼 기름치고 닦아 주고 돌보아주는 듬직한 기관사 아저씨 , 치치에게 석탄과 물을 먹여 주는 젊고 멋진 화부 아저씨 올리, 커다란 시계로 출발시간을 알려주는 침착한 표정의 승무원 아저씨 아치볼트.

 세명의 베테랑 아저씨들이 가장 자신 있는 포즈로 은은히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은 그림책 전체를 지배하는 안정감을 부여한다.  든든한 마음은 치치가 사고로 길을 헤매더라도 결국  어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있을 것만 같다.

 

둘째,  그림책에는 화를 내는 어른이 없다.

치치가 엉망진창으로 일을 벌이고   어른들과 동물들은 혼비백산하지만 이내 모두가 치치를 찾아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치치의 말괄량이 행동에 모두가 혀를 차지만  마음에 미움은 없다. ‘아휴, 이쪽으로 갔으니까 말괄량이 치치  빨리 데려 오세요.’ 이런 마음이다. 모두가 수신호를 주며 치치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염원한다.  명의 우리 베테랑들은 여러 어른과 동물들의 힘을 빌어 치치를 찾아 나선다.

 

 두 가지 분위기가 자아내는 단단한 힘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편안하게  주었다. 결국 그림책이고 동화일 뿐이지만 여기 어른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말괄량이 치치를 지지해 주고, 다시 보금자리로 돌아올  있도록  마음을  한다.

나는 작가인 엄마가   명의 독자인 아들에게  마음을 전달해 주려 했을 것으로 상상을  본다.

네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나는 너를 지지한다. 너에겐 돌아올 장소가 있어. 마음껏 세상에 나가 펼치고 나서는 걱정 말고 돌아와 쉬렴.”

 

만약 치치를 찾아내었다면 어떻게 하는  좋을까?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뼛속까지 새겨지게 혼구녕을 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혹은, 치치는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지 않을까? 단지 안아주었을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며 진정으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는 서로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되, 짚어봐야  부분이 있다. 아이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믿음만으로 자라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림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은 아이에게 감정적인 화를 내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바램이었다. 그리고 단지 공감과 지지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말썽 부리고, 싸우고, 꺾이고, 다시 일어서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말이다. 그리고 고향 같은 존재가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결국 돌아와   있는 안식처 같은 것으로.

그런 작가의 마음이 공명했던 것일까, 그리고 글을 쓰면서 한번 더 다짐해 보려던 것일까. 어떻게 보면 상당히 오래된,  명의 독자만을 위했던  책을 한번 언급해 보고 싶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과연 이상적인 동화일 뿐일지 모르지만.

90여 년의 세월을 거스른 관록이 다시 한번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여기엔 화를 내는 어른이 없어.’

 

 

 

 

<별책부록>

돌아갈 안식처가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일이다.

바깥에서 전투를 치르고 나면 아이고 어른이고 다를  없다. 우리는 돌아올 곳이 필요하다. 그리고  따뜻한 곳에서 서로를 다독이고 상처를 치료하고 보급품을 수령하여 우린 다시 전장으로 나갈  있다.

Shelter 쉘터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안식처라는 단어보다   억센 소리의 어감이 적극적으로 막아준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결국에는 돌아가   있는 쉘터가 있기를 기원한다. 든든한 수호신이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여기 작은 음악이 당신을 그곳으로 안내하는 귀갓길의 나침반이 되어주길 바라며.

 

 

Mondo Grosso [MG4]  2000  <1974 – Way Home>

https://youtu.be/B_6fspGWQSs?si=27xtnc9N5Sbq5v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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