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ff Jung Mar 13. 2024

혼자서 집 보기 해냈단 말이야

이와사키 치히로 <치치가 온 바다>

그림 만으로 완벽하게 눈이 멀어버린 책이다.

어느 날 퇴근길 사 온 아내의 그림책, 언제나처럼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는 차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혼자서 우와! 오와! 미친놈처럼 감탄사를 터뜨리면서 말이다. ‘이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야!’ 연극 같은 과장에 아이는 덩달아 신나 하고….

작가의 연혁을 살펴본다. 일본 여류 작가이다. 이와사키 치히로라고 한다.

1918년 생이라니 정말 오래된 분이구나. 2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가해국이란 것을 안 후 생전 반전, 인권운동에 앞장섰다고 하며, 그 마음을 그림책에 동심으로 담았다고 한다.

대단해, 대단해. 버려진 아이는 어느새 혼자 놀고 있고 아빠란 작자는 등 돌리고 앉아 그림책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 책이 <비 오는 날 집 보기> 였다.

남편의 호들갑에 아내는 엉겁결에 그녀의 다른 책을 수소문하게 되니, 이제 책장에는 한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모든 책이 꽂히게 되었다. 관심이 생기면 달리 보인다고 했던가, 어느 날 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녀의 그림책 전시회를 알게 되어 직접 여러 작품들을 접하게 되는 호사 또한 누리게 된다. 언젠가 도쿄나 나고야를 간다면 일정 중에 그녀의 이름을 딴 치히로 미술관을 들러 보고픈 열망이 생긴다. 그녀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행운과도 같다. 어른이 그림책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크게 다가왔을까?

그녀의 그림책은 크게 두 가지에서 진한 개성을 풍긴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비교 불가한 화풍이며 두 번째는 아이만이 존재하는 화면이다.



여기, 투명한 그림이 있다.

이와사키 치히로는 기본적으로 수채화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자세히 보면 그 수채화풍이 여느 서양화와는 완벽히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 그녀의 그림에는 밑그림이나 스케치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한 호흡으로 서예를 하듯 수채 물감을 곳곳에 펼치며 그림을 만들어 나간다. 굵은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듯 아름다운 여러 색상을 농도를 조절하며 부드럽게 융화시켜 나간다. 대충 스윽스윽 그린 것 같은 살색에 컬이 있는 머릿결, 검정색 두 덩이를 넣으니 투명한 아이 얼굴이 되는 식이다. 이 선의 경계가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두리뭉실함은 아직 다듬어져 있지 않은 아이와, 얘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표현하는 데 무엇보다도 적절하단 생각이 든다. 한 순간 줄어들었다가 다시 뭉글뭉글 구름처럼 퍼져나가듯, 한계가 없는 아이의 동심을 날카로운 선으로 가둘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녀의 이런 화풍은 배경을 그릴 때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때론 단색으로, 때론 흑백으로, 때론 강렬한 붉은색으로 펼쳐놓은 배경은 글보다 앞서 아이의 마음을 함축해 준다. 예를 들어 친구 생일잔치에서 실수로 촛불을 끈 후 뛰쳐나간 다음 장면은 두 면을 온통 지배하는 어두스름한 하늘로 펼쳐 놓고, 아이는 조그마하게 대비하여 황량한 마음을 대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채롭게 활용한 독특한 색감 또한 감탄할 만하다. 몇 가지 색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 색조차 물을 잔뜩 머금은 데도 불구하고 강한 원색을 사용한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있다. 은근한 화사함이 넘쳐나 책을 보는 이로 하여금 평안한 마음을 들게 한다. 이게 아마 마음의 색채이지 싶은….

본 브런치북의 표지 그림이 무엇인지 인지하신 분도 계실 것 같다. 맞다. <포치가 온 바다> (치치가 온 바다) 에서 앞서 언급한 매력들이 한 방에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는데 제목으로 잘 가려져서 삽입해 보았다. 아이와 매번 환호성을 지르며 넘기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여기 한 아이가 있다.

그녀의 그림책에는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도적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여느 날의 독백이 이어지는 것이 그림책의 전부이다. 일상의 잔물결이 일렁인다. 일인칭의 화자가 조그마한 아이인데 어른의 시각에서 어떠한 거대한 사건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달리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심심한 전개일 지도 모르겠다. 하품이 나오려나?

하지만 또 달리 보면 아이의 시각에서는 이것은 매우 큰 일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고 섬세한 부분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 같다. 아이의 마음 같은 아름다운 그림이 작은 이야기들과 어우러질 때 우리는 낮은 시선을 배워 나간다.  


신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바다가 보이는 할머니 집으로 놀러 갔어, 두고 온 치치 때문에 즐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치치가 온 바다>


친구 생일에 실수하고 온 후 나의 마음은 모두가 다 싫어. 나의 생일 같은 것 싫고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딱 한 가지만 소원을 빌어보고 싶어 <눈 오는 날의 생일>


작은 새가 온 날, 엄마는 바쁘고 곰돌이는 말을 안 해. 작은 새가 자꾸만 다른 쪽을 보고 있어. 어떡하지.  <작은 새가 온 날>


엄마는 오래오래 집에 없었어. 그치만 오늘은 아기랑 함께 온대. 아기한테 곰돌이를 주고 싶어, 그런데 곰돌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아기 오는 날>


이웃에 이사 온 아이는 어떤 애? 쳇 남자아이잖아. 나도 놀아주지 않을 거야. 엉겁결에 흙이 다 묻도록 놀고 부모님께 혼이 났어. 그 애는 이제 다시 오지 않겠지?  <이웃에 온 아이>


금방 온다던 엄마는 아직 안 오고 난 혼자야.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에 커튼 뒤로 숨게 돼. 점점 어두워지는데 엄마 빨리 와. 혼자서 집 보기 해냈단 말이야 <비 오는 날 집 보기>  



왠지 그녀가 살았던 시대를 상상해 보면 잿빛으로 가득했을 것 같다. 적당히 모두들 가난했던 시절. 내 코흘리개 어린 시절을 돌아봐도 흑백처럼 찌뿌둥한 이미지가 대다수를 차지할 뿐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그림책에서 표현하는 세상은 투명하고도 눈부시다. 시대를 한참 건너뛴 현재에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을 정도로 색감이 파릇푸릇하다. 좋은 작품은 시간의 퇴색을 겪지 않는다는 명제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왜 현재 그 마음이 이어지는가? 왜 그림에 감동을 하는가?

알게 모르게 우리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습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루어질 수 없더라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다다르고 싶은 어떤 지향점의 높은 선.

그리고, 그녀는 생전 그리고 싶었던 유토피아를 아이들 마음속에서 찾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함께 공감하게 된다. 그 열망과 같은 색상을 받아들이고 싶다.


그녀는 이미 떠났지만, 꿈꾸던 세상을 향한 마음은 전 세계 곳곳으로 퍼지게 되었네. 그 하나의 기원이 시공간을 넘어 한국의 어느 중년 남성에게 꽂히게 된 날이 있다.

아이의 그림책을 뺏어 읽은 날이다.




<별책 부록>

푸른 바다를 생각하면 어떤 구도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두 연인이 함께 오도카니 서서 한없이 바라보던 조용한 바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말이다. 다케시 영화는 모두 다 즐겨하지만 특히 이 영화는 마음속 깊은 곳에 원형기억처럼 자리 잡고 있다. 쓰레기 수거일을 하는 벙어리 청년이 어느 날 부서진 보드를 발견하고 서핑하러 나간 바다. 그를 묵묵히 바라 봐 주는 여자 친구. 어느 날 운명처럼 만나게 된 파도를 타고 그는 또 다른 꿈으로 나아갔을지, 다시 웃으며 돌아올지.

무성영화 같은 대사와 단지 푸른 시야로 가득한 화면, 무심히 바라보는 시선, 함께 걸어가기, 그리고 Hisaishi Joe 히사이시 조의 청량감 가득한 유치함.

나는 문득 이 영화만큼 바다에 얽힌 별책부록으로 어울리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영화 또한 그림책이니까.


Hisaishi Joe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OST] 1991년 <Silent love (Main Theme)>

https://youtu.be/5WZIP3jLyt8?si=cgcaOS7owSgLB2g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