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와 자주색 크레파스> 크로켓 존슨 글. 그림/서애경 옮김
당신은 희디 흰 도화지를 앞에 두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아니, 여기 브런치에는 대다수 글을 쓰기 위해 모인 공간이므로 하얀 디지털 종이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를 앞에 두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먼저 얘기하면 좋을 것 같다. 마주하는 느낌은 아마 과거가 다를 것이고 글을 쓰는 현재가 또 다를 것이다.
나에 얽힌 마음을 우선 공유해 보자.
어릴 적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한창 글쓰기에 몰두한 적이 있다. 비록 보잘것없는 개인 일상을 나열하는 정도의 수필 형식이었지만 글쓰기가 재미있었던 느낌만은 새록새록하다. 친구들로 구성된 몇몇 방문객과 함께 댓글 소통도 하고 말이다. 그 홈페이지의 방문자 게시판에서 근 십 년 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의 친구가 아내까지 되었으니 나름 소임은 다하고 폭파되었구나 싶다.
글이 뜨겁게 용암처럼 흘러나왔다. 머리가 지속적으로 미열을 호소해 무언가를 토해 내어야 했다. 그것이 성긴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그런 자연스럽게 써지는 느낌이 생경했다. 어떤 인위적인 노력 없이 글이 계속 글을 인도하는 무한 증식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싶다.
누구나 겪듯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육아하고, 사회의 최전선 라인에서 생활하며 글쓰기가 멀어졌다. 열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번씩 생각이 나는 것 있지 않나. 그리고 그런 어투 ‘해야 되는데…..’ 라는 것. 실현될 리 없는 뉘앙스와 마음의 부담감 만을 종용하는 ‘글 다시 써 봐야 되는데….’라는 어투 말이다. 뭐 글쓰기가 별 건가, 그냥 쓰면 되는 거지 싶은데 써지지 않더라. 뉴턴의 관성의 법칙은 진리와도 같은지라, 모니터의 깜박이는 커서와 흰 디지털 종이가 부담스러워 근 15년을 ‘해야 되는데’로 살게 되었다. 이제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다시 시작해 보는 마음은 그래서 개인적으로 소중하다.
지금이라고 글쓰기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다시 발을 내디딘 지금은 과거와는 다르다. 더 이상 머리가 뜨거워 분출하듯 나오는 요행은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고, 앞으로는 글근육으로만 글이 써질 걸 알고 있다. 달리기를 하면 할수록 야금야금 달리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처럼, 글을 쓰면 쓸수록 글근육이 조금씩 자라는 것을 말이다.
잘 쓰든, 못 쓰든, 흡족하든, 미흡하든 글을 쓴다는 명제를 가지고 있으면 일상생활을 관찰하는 시선과 리듬이 거기에 맞추어지는 것을 느낀다. 자연스럽게 메모장이 늘어난다. 그리고 쓴다는 행위가 루틴처럼 일어난다. 조금씩 다듬어질 미래의 근육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희디 흰 도화지를 앞에 두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이 또한 글쓰기를 대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사실 너무도 막연하다. 그림근육이 없으니 뻥 뚫린 공허가 직설처럼 정신을 아득하게 할 뿐.
나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현실로 옮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는 여전히 물음표로 가득하다. 왜 이런 명제를 꺼내었는가 하면, 그림의 매력을 알기 때문에 ‘나도 그림을 그려봤으면’ 하는 열망이 있는 것이다. 특히, 펜 한 자루만 있으면 쉽게 접근하는 스케치 같은 것. 예를 들어 홀로 떠난 낯선 여행지에서 쉽게 꺼내 든 흰 종이에 그려진 크로키와 이야기 단상, 그런 그림작가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이 행위는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넘어야 할 높이가 보이지 않아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물론 여기에도 왕도가 없을 것이다.
글쓰기에서 얘기한 방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을 마음으로는 알고 있다. 그냥 그려야 한다는 것을, 그림근육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소질이 없어. 내 취향은 아니야’ 라는 말을 하려면 그만큼의 연습을 해 본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마음 가는 데로 죽죽 긋는 몇 가닥 선으로 멋진 그림으로 탄생하고, 이것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그림책의 매력을 접하니 다시 ‘해야 되는데….’가 슬그머니 머리를 드민다. 과연 이것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시도를 해 볼 수 있을 것인가?
과연 해럴드는 주저하는 나에게 어떤 얘기를 해 줄 것인가.
<해럴드와 자주색 크레파스>에는 흰 도화지가 있다. 그리고 자주색 크레파스를 든 해럴드가 있다. 그게 이 그림책의 전부이다.
많아봐야 서너 살로 보이는 해럴드는 호기심도 많고 머리도 좋다.
그림책은 달밤 산책을 나가고 싶어 하는 해럴드의 다짐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달이 안 보이네. 어떻게 산책을 하지?
해럴드는 달을 그리고 죽 뻗은 길을 세 가닥의 선으로 완성한다. 산책의 시작이다. 오랫동안 걷는 길이 지겨울 때 즈음 샛길을 그려보자. 길을 잃지 않도록 나무가 한 그루만 있는 작은 숲을 그리고 말이지. 그려보니 작은 나무는 사과나무였구나. 과실이 풍성한데 누가 다 따먹으면 어떡하지? 이를 지킬 용을 그리면 될 거야. 그려 놓고 보니 자신이 그린 용이 무서워졌어. 덜덜 떨며 뒷걸음치는데 떨림이 파도를 만들어 해럴드는 물에 그만 빠져 버리고 말았네.
과연 재치 넘치는 해럴드는 이 난관을 잘 헤쳐 나가 따뜻한 잠자리가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그림이란 게 몇 가지 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구나. 라는 명제를 그림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죽죽 그은 선 몇 가닥으로 모험을 떠나고 위기를 극복하는 해럴드의 용기가 부러웠다. 이렇게 쉬운 그림을 말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올곧이 자신이 생각해 내는 데로 이루어진다. 당연하다. 그림이니까 말이야. 하얀 도화지 위로 날아다니는 자주색 펜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해 줄 수 있다. 일면 참 매력적인 걸. 내가 마음대로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무한대의 공간을 가지는 것 말이다.
아이들은 해럴드와 같다. 하얀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것 따위 하나도 어려울 게 없다. 나의 딸도 그랬고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어른들은 해럴드를 부러워하며 가만히 있는다. 그림을 그리는 스킬과 지식 따위 훨씬 뛰어나지만 말이다. 언제부터 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난 어른이라 이제 해럴드와 같은 쉬운 마음으로 그림을 대할 수 없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 설피 잠든 밤, 문득 꿈에서 누군가가 일갈을 한다.
이봐,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해럴드와 자주색 크레파스>는 크로켓 아저씨가 50살 때 그린 책이라구!
<별책 부록>
해럴드, 너는 앞으로 계속 자라게 되고 자주색 크레파스는 어느 순간 다 닳아서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그러면 너도 어른의 대열에 진입하겠지.
어른이 된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하지만,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어른들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도록 특히 이런 이들을 조심하렴.
‘아픈 상처 하나 없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작은 영광’을 가지고 ‘발만 겨우 담가 놓고 모험담이 끊이지 않는’ 배 떠난 부두의 선원들 같은 이들 말이야.
너는 이미 풍성해. 자주색 크레파스로 그려내었던 수많은 그림과 풍경, 위기의 순간에도 능동적으로 이겨낸 모험담들이 켜켜이 내면에 쌓여 있을 거야. 결코 없어지지 않을 소중한 경험이지. 그 마음을 간직하고 무심히 실행해 보는 어른으로 자라나길.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말이야.
검정치마 <Don’t you worry baby (I’m only swimming)> 2011년 <이별노래>
https://youtu.be/Bj7MsRfG26o?si=23N69S7X7LcCfa8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