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저는 달리는 사람입니다.
종착역에 도달했다.
어떤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하다고 했으니 근본적인 얘기로 마침표를 찍자.
1) 숨은 조력자
처음에 본 글쓰기를 기획하게 되었을 때 동력이 있었다. 당연히 달리기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큰 에너지였지만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
아내가 불현듯 올 1월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주말에 가족이 늦잠 자는 이른 아침, 달리기를 하고 뿌듯하게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동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권한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전에는 트레드밀에서 걷기가 기본이었지만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도 딴에 경험이 있다고 몇 가지만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 어쨌든 다치지 않고 기분 좋은 달리기가 되어야 할 것이니까.
우선 이런 속도로 달려도 되는가 싶은 정도로 느리게 세팅하고 달려보라고 제안했고 (EP.02).
달리기 전후로 스트레칭만 잘해도 자고 일어나서 근육통이 없을 것이며, 햄스트링을 꼼꼼히 해라고 제안했으며 (EP.03).
거리로 목표를 잡으면 힘들 테니, 시간으로 목표를 잡고 매우 천천히 올려볼 것을 제안했으며 (EP.04).
호흡은 나중에는 편해질 거라고 격려하며 알아서 편한 데로 해보라고 했고 (EP.05).
달리기 초보인데 밖에서 달리기 좀 그렇다는 주저함에, 사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으니 자신과 대화하는 데 집중해 볼 것을 얘기해 보기도 하고 (EP.08).
남이 어떤 속도로, 어떤 거리를 달리든 신경 쓰지 말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달리기를 하면 된다고 격려하기도 하며 (EP.09), 지나간 사이.
시간이 어느덧 9개월이 지나갔다.
어느 날 아내가 보내온 문자에는 달린 시간이 30분을 훌쩍 넘어가 있는 디스플레이 사진이 있었다.
깜짝이야! 그동안 한 번도 진행 상황을 공개하지 않았었는데, 홀로 야금야금 달리기 심장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문자를 보내며 그녀가 얼마나 뿌듯해 하고 의기양양했을지가 상상이 되어너털웃음을 터트렸던 게 기억난다.
느리더라도 30분을 꾸준히 달리는 심폐지구력 심장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한 경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너머의 지점은 각자가 알아서 더하고 덜하면 될 테니 말이다.
달리기를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 몇 가지 챕터만 집중해도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를 실전으로 선보인 이가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 얼마나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겠나.
이 자리를 빌려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2) 나만 정직하게 바라보기
처음 글을 쓸 때 가장 우려하고 조심했던 부분은 별 실력도 없는 일반인이 이런 전문성이 필요한 글을 쓸 수 있는가였다. 당연히 어느 수준 이상에서는 안될 말이고 한창 달리고 계신 분들은 콧웃음을 칠 내용뿐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타켓층과 목적을 정하고 글을 썼다.
고등학교 체력장 이후 한 번도 달려보지 않으신 분
막연히 달리기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과 오해가 있으신 분
처음 달리실 때 가장 필요한 핵심 지식을 찾으시는 분
그렇게 읽으실 수 있는 독자층을 정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글을 쓰는 동력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조금 차별화를 넣었던 부분은 달리기를 운동의 시점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으로 확대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근본 이유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걷기는 모두가 하고 있다. 퇴근 후 산책 명목으로 할 수도 있고, 파워 워킹으로 할 수도 있고, 헬스장에서 몸 풀기 용도로도 많이 하신다. 칸트는 시계추처럼 일정한 산책을 바탕으로 그의 책을 썼을 것이다. 그 효용이야 말해 무엇하리. 개인적으로도 걷는 것 많이 좋아한다.
그런데 달리기에 대해 언급을 한다. 걷기와는 차원이 다른 명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달리기는 우선 정신적인 사색을 방해한다. 그런 것은 닥치라는 태도이다. 응?
달리기 시작하면 우선 우리는 자신의 몸뚱아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어떤 잡념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정말 자신의 몸에 대해서만 들여다보아야 한다. 안 그러면 쓰러지고 넘어지니까.
이 행위는 상당히 정직하여 자신을 발가벗기는 효과가 있다. 때론 우리는 세상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혼자 있는 시간조차도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있다.
달리는 순간, 우리는 어떤 가면도 쓸 수 없고 맨 정신으로 자신의 바닥을 들여다보게 된다. 머릿속의 잡념, 생각은 사치가 되기 일쑤다.
그렇게 발가벗고 자신의 몸이 처한 상황에 무장해제된 상태로 달리기를 몇 십분, 몸이 엔진이 되어 계속 무한반복을 수행하는 와중에 우리는 문득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어떤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한참을 어떤 생각을 하고 달리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화들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고 하면 저 바닥의 돌부리와 가쁜 호흡과 자신의 움직임을 인지하지 않은 채 잡생각에 빠져 몇 분이 이미 흘러갔단 진행형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그러기도 잠시, 머릿속에 올라온 생각을 이번엔 찬찬히 뜯어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나는 이를 Flow 플로우 속에 들어가 있다라고 이름 짓고 싶다.
그리고 달리는 속에서 비로소 떠오르는 생각들은 걷기에서의 사색과는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긴장된 상황에 놓인 뇌가 내뱉는 잡생각들은 왠지, 조금 다른 결로 찾아올 것 같지 않은가? 그닥 의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의 경우는 예를 들어 오래 생각했던 것이 다른 관점에서 갑자기 훅 들어오기도 하고, 옛 부끄러웠던 기억들이 소환되는가 하면, 고민하던 글쓰기에서 쓸만한 문장도 불현듯 생각나는 등 긍정적인 경험들이 플로우의 공간에서 함께 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해 달리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몸과 가장 정직하게 발가벗고 대화를 시작할 때 비로소 정신도 함께 따뜻한 손을 내미는 듯하다. 그리고 그 대화는 강력하다.
이 시간,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나 혼자의 시간. 누구도 배려하지 않고, 어느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나를 마주하는 시간.
이것은 내가 달리기를 평생 가져가겠단 마음을 먹게 된 가장 큰 이유이며,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이다.
3) 나만의 속도로 느리게 더 느리게
일전 EP.02에서 더 느리게 달려서 페이스를 6분 30초 정도로 잡고 있다고 언급했고, 그래서 초창기 힘들었던 달리기가 더 좋아졌다고 말씀드렸다.
본 연재를 하는 와중에 나는 의도적인 실험을 한차례 더 하게 되었다. 장광현 작가님께서 코로 호흡한다는 말씀이 어떤 힌트가 되었다. 코로 호흡을 하며 좀 더 편안한 페이스를 시도해 보았다. 끝나고 나서 확인한 시간을 보니 7분 10초 정도였다. 그리고 그 달릴 때의 기분이란 기존 느렸던 페이스 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다.
달리면서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호흡도 더욱 안정적이었으며, 특히 감흥이 컸던 것은 그 페이스로 한 시간 정도 달리고 나서 드는 느낌이 ‘이 상태로 한 시간 더 달려도 괜찮겠는데…’ 였다.
이런 결과는 이후 달리기를 떠올릴 때마다 더욱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때 심박수가 150대였다. 그 정도 레벨이 나에게 맞는 옷이구나 라고 확인한 후 나의 페이스는 이후 다시 한번 수정된 상태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페이스를 7분 10초 정도로 더 느리게 바꾸고 긴 시간을 달릴 예정이다.
혹시나 이런 졸문을 읽는 분 중에 현재 달리기를 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리고 달릴 때마다 너무 힘들고 전투한다는 느낌이 드는 분이 계시다면 속도를 느리게 해 보시기를 추천한다. 정해 놓은 속도나 거리를 달성해야 하는 분이라면 이런 얘기 따윈 쓸모가 없겠지만, 이렇게 달려도 되나 싶은 속도로 느리게 한번 달려 보시고 그 느낌을 곱씹어보시기를 제안드린다. 적어도 달리기를 떠올릴 때 더 기분 좋아질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그리고 사실 언급을 안 한 히든카드가 있다. 느리게 달려야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건 공인된 사실이다.
이것은 엘리트 선수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기본 훈련법이다. LSD (Long Slow Distance) 훈련이라고 장거리를 매우 낮은 심박수로 느리게 달리는 것이다. 이는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키고 달리기 위한 기초 체력을 쌓는데 필수적인 훈련이니 만큼 처음에 느리게 달리는 분들은 결국 무조건 빨리 달리게 된다.
4)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다. 공허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문득 검정색 포르쉐가 끼익 앞에 선다.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 앞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샤넹 자켓에 에르메승 버킨 백을 들고 다가오는 자태에 진한 향기가 어린다. 풍성한 머릿결 위로 구찡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며 그녀가 한 마디를 건넨다.
혹시, 시간 되시면 함께 차라./
/동작대교 가실라믄 저 쪽으로 가서 797번 타시믄 되어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다. 공허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다가 올 미래를 생각한다.
문득, 어떤 여인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검정색 룰루레몽 레깅스에 하얀색 Hokang 러닝화를 신고 있다. 탱크탑 민소매는 가벼운 점퍼로 감싸고, 머리는 질끈 묶어 핑크색 헤어 밴드로 멋을 내고 있다.
귀에 건 이어폰을 벗고 그녀가 한 마디를 건넨다.
혹시, 동작대교 갈라./
아, 네네. 동작대교 그렇지요. 사실 시간이란 게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동작대교 좋죠. 양화대교 보다도 더 좋구요. 기냥 고 남단에서 한남대교까지 팍 쏘면 강변 따라 야경도 얼마나 멋들어지겠습니까. 살다 보면 누군가와 얘기도 하고 싶고, 밥 한 끼 함께 나누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인데 제가 왜 그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걷다가 달리다가 보면 없던 정도 쌓이는데 오늘 같은 화창한 날에 이를 무시하는 것도 천운을 거스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류사 이래로 저기 새는 날고 염소는 풀을 뜯고 물고기는 헤엄치는데 인간은 함께 달리면서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요. 좋죠. 좋구 말구요. 자, 그럼 가실까요?/
/저기, 동작대교 갈라면 몇 번…
뭐, 그런. (스테레오타입으로 희화화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이제 달리는 사람이라면 뭔가 주는 것 없이 선입견을 가질 것 같다. 적어도 자신을 가감 없이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일 것 같아서 말이다. 삶은 정직하게 돌아온다는 작은 명제를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달려서 세상이 반할 사람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런 질문에 기분 좋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저는 달리는 사람입니다.'
음악을 듣는 게 너무 행복한 나는 약한 고리를 줄곧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기를 알게 된 이후 그 지점을 단단한 무언가로 연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인생에서 아귀를 제대로 맞추어 중심점을 찾아가는 우아한 궤도를 만들어 준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 불현듯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음악 듣기에 행복해하고, 느리게 달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