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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The Bankers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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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Feb 15. 2022

갑을병

소설 The Bankers_을의 화장실 동굴


‘쾅쾅쾅!!’



“엄마!! 문 열어 봐!! 다윤이가 미안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아이들이 화장실 문 앞에 매달려 있었다. 큰아이는 소리 지르고 둘째는 앉아서 울고. 아내가 한계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지만, IB의 업무 강도보다 두 아이 육아의 업무 강도가 훨씬 세다고 나는 확신한다. 아내는 참고 또 참다가 도저히 마인드 컨트롤이 안 되면 아주 가끔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아내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을 전혀 해 본 적 없이 살아온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엄마’를 종일 외치며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 문에, 아내는 혼자만의 시간도 공간도 집에서 찾지 못했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아내는 화장실 동굴로 갔다. 안타까웠다.



“일찍 왔네.”               

아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와서 저녁을 차렸다. 설거지와 청소는 내가 했다. 아내는 아이들을 씻기고 언제나처럼 책을 읽어주었다. 옆에서 내가 슬쩍 말했다.     



“애들 재우고 맥주 한 캔 마실래?”               



아내가 아이들을 재우는 동안 나는 상가의 편의점에 뛰어갔다. 맥주 네 캔에 만 원. 아내가 좋아하는 흑맥주와 내가 좋아하는 에일을 적당히 골랐다. 안주는 고민하다가 고래밥으로 했다.          



“일을 다시 해 볼까?”

말없이 맥주만 홀짝거리던 아내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분께서 연락 주셨어. 재작년에 퇴직하셨대. 비영리재단을 설립하려고 준비 중인데 혹시 뜻있으면 함께하자고 말씀하시더라고. 아이들이 어려서 힘들 것 같다며 거절하긴 했는데…. 나를 기억해줘서 고마웠어.

“하고 싶어?”

“모르겠어. 애들을 종일반에 보내 놓고 한번 해 볼까 싶다가도…. 저 어린것들을 어떻게 하루 종일 보내…. 등‧하원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런데 오늘처럼 너무 화가 나서 스스로가 감당이 안 될 때는, 나 같은 엄마랑 있는 것보다 어린이집에 가 있는 게 애들한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오늘 힘들었구나. 맥주 마시고 일찍 잠이나 자.”                          






그다음 날, 나는 박 이사와 함께 여의도와 잠실에서 일정이 있었다. 우리는 여의도의 회의 장소에 30분 일찍 도착했다. 근처에서 커피한 잔 마시며 주요 내용을 검토했다. 회의는 잘 끝났다. 문제는, 예상보다 늦게 끝나서 잠실까지 이동할 시간이 빠듯하다는 점이었다. 서둘러 택시를 탔다. 올림픽대로에 차가 많아서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박 이사도 나도 애가 탔다.     



“이사님, 그런데 삼성물산은 외화채 발행을 한 적이 없지 않나요?”

꽉 막힌 도로만 쳐다보고 있으면 뭐하나. 내가 박 이사에게 말을 걸었다.               



“응. 삼성이잖아. 자금 조달하는데 굳이 채권까지 발행할 필요가 없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왜 가야 해요?”

“우리? 우리는 을이잖아. 아니다, 병쯤 되겠다. 하하하.”               



외국계 투자은행.     

화려해 보이는 우리 명함의 뒷면은 ‘을’이다. 상업은행과 달리 개인과의 접점이 없어서 대부분 낯설게 생각하지만, 업무의 본질은 영업과 고객 만족이다.     



‘갑’은 ‘을’들을 놓고 누가 과연 마음에 쏙 들지 저울질을 한다. 때로는 크리스마스이브나 설 전날에 입찰 공고를 띄우며 제안서 제출까지 삼 일을 준다. 이번에는 다른 곳에 일을 맡길 것을 훤히 알면서도 ‘을’은 밤을 새워 제안서를 작성해야 한다. 때로는 충성심을 견주어 보기도 한다. ‘세일즈’ 부서만 영업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을’의 본분에 맞게 자주 찾아뵈어야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만약 ‘갑’의 주요 인사가 갑자기 ‘을’의 주요 인사들을 모아 오찬을 하고 싶다고 하면, 바이러스건 백신이건 간에 모여서 숟가락을 들어야 한다.     



‘갑’의 선택을 받고 난 후에도 ‘을’은 본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갑’의 시간을 아껴주고 노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을’은 지난 학업과 경력과 경험과 인맥을 모두 동원해서 전문성을 발휘해야 한다. 또한 ‘갑’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 두 시간 반을 달려가서 십분 동안 퍼런스 콜을 세팅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통역이나 메일의 오탈자 검토까지도 - 해 주어야 한다. ‘을’의 잘못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갑’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컨퍼런스콜에 세계 몇 개국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든 간에 ‘갑’은 우리말로 잘못을 엄중히 문책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대가로 ‘을’은 상당히 비싼 수수료를 받으니, 남의 돈 받기가 밤하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세상에서 이만하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외국계 컨설팅회사나 로펌, 대형 회계법인 등도 속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갑이네 을이네 하는 것에 별로 미련이 없다. 그저 우리 집 다섯 살짜리가 좋아하는 역할놀이의 어른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을’이 되는 나도 돌아서면 누군가에게 ‘갑’이 되고, 어제는 '갑'이었다가 오늘은 '을'이 되어보는 역할놀이 말이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나도 누군가에게 못된 갑질을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누군가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택시는 제시간에 도착했다. 비록 약속 시각 30분 전은 아니었으나 헐레벌떡 뛰어갈 정도도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답게 상당히 세련된 매너로 맞아주었다. 시종일관 정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 얼굴도장을 찍고 – 다음의 만남을 기약했다.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탔다. 해가 길어졌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까보다 차가 더 많다. 그래도 일이 잘 끝나서 박 이사의 표정에 여유가 있었다. 나는 아내가 보낸 카톡을 뒤늦게 확인했다. 아이들이 물감을 뒤집어쓰고 신나게 웃고 있었다. 옆에서 힐끗 쳐다보던 박 이사가 갑자기 물었다.     



“아내는 무슨 일을 해?”

“집에 있어요. 애가 둘이잖아요.”

“연대 출신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아? 요즘 뉴스 같은데 보면 그런 이야기 많잖아.”

“안 그래도 어제 일을 다시 할까 물어보더라요.”

“강 부장은 어떤데?”

“잘 모르겠어요.”               



지난밤의 일이 생각났다. 박 이사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나는 아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어떻게 아내를 지원해 주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하는 엄마는 더 행복할까. 직장에서 얻게 되는 성취감, 연봉과 승진으로 보상받는 만족감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일하는 엄마가 너무 고단해 보인다. 이제 유치원에 들어가는 첫째와 막 돌이 지난 둘째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퇴근 후 집으로 출근하는 엄마. 아무리 아빠가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해도 몸도 마음도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하는 나는 아내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어린이집에서나 시터의 손에서 엄마가 퇴근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이들은 또 어떨까. 아이들이 조금 더 크고 나면 괜찮을까. 문득 최 대리의 얼굴이 스쳤다. 가슴이 아려왔다.    



사무실로 돌아와 이런저런 일을 마무리하고 보니 열 시가 넘었다. 박 이사도 최 대리도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숨 좀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갔다. 문을 닫고 변기에 앉아서 아이들 사진을 다시 보았다. 동영상도 있었다. 웃음이 났다.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어제 화장실에 들어가 있던 아내의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박 이사가 도무지 엉덩이를 뗄 것 같지 않아서 먼저 퇴근하겠다고 인사를 했다. 광화문 우체국 앞의 중앙버스정류장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파란색 버스를 탔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틀었다. ‘밤편지’가 흘러나왔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 버스의 창에 비치는 도로의 불빛이 집까지 을 밝혀주는 도시의 반딧불처럼 보였다. 몇 번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아내가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자기. 밖에 꽤 춥던데 차 한 잔 줄까?”     



씻고 나오니 식탁 위에 샛노란 꽃이 동동 떠 있는 국화차가 적당한 온도로 식어 있었다.



“나, 그 일 하지 않기로 했어. 자기 혹시나 마음 쓰일까 봐 얘기해.”

아내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때 글 써보겠다는 건 어떻게 됐어?”           



그제야 아내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자기가 저번에 읽고 재미없다면서. 최초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는데 글을 어떻게 써.”


              

내가 그랬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아까 애들은 왜 온몸에 물감을 칠했대?”

“다윤이가 갑자기 물감 놀이를 하고 싶다는 거야. 다준이가 먹을까 봐 안 해주려다가 하도 조르길래 큰 비닐 깔았어. 종이 접시 몇 개에 다윤이가 좋아하는 노란색, 분홍색, 하늘색 물감 짜주고 스케치북을 가져다줬는데 둘이서 물감 위에서 뒹굴더라고. 물감 놀이는 10분 하고 치우고 씻기는 데 50분이 걸렸지. 그래도 어쩌겠어. 갑이 해달라고 조르는데. 나는 을이잖아.”



생각해보니 아내는 나보다 더 대단한 갑을 모시고 산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받으며.




본 소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사건,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IB는 Investment Bank‧투자은행의 약자입니다.

사진은 Pexels에서 검색하여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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