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은 보안상의 이유로 별도의 공간에서 근무한다. 전무는 사무실에 없을 때가 많아서 주로 셋이 있다. 엘리베이터의 23층에서 내리면, 옷깃이 스치는 소리조차 모두 삼켜버리는 것 같은 검붉은 카펫이 깔린, 어둡고 긴 복도가 있다. 엘리베이터의 맞은편, 복도 중앙에 있는 큰 문으로 직원 대부분이 들어간다. 우리는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화장실을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간 후에 복도 끝에서 사원증을 댄다.
유리문 너머로 국내‧외 경제 신문과 잡지가 가지런히 서 있는 원목 선반이 보인다. 선반 옆에는 어두운 빛깔의 길쭉한 도자기 화병이 하나 있다. 누군가가 매 주 꽃 한 다발을 바꿔가며 꽂아둔다. 들어가서 다섯 발짝 정도 걸으면 몇 가지 간식이 놓인 둥근 테이블이 있다. 네스프레소 커피머신과 캡슐은 창가 쪽에 있는 긴 책상 한쪽 구석에 있고 그 옆 코너에 정수기가 있다. 정수기의 맞은편 벽면에는 마치 몬드리안의 추상화 같은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 칸딘스키 느낌의 따뜻한 그림으로 걸어 두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가끔 든다. 물을 한 컵 받아 들고 오른쪽으로 간다. 유리로 된 방이 두 개 있다. 끝 방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무의 책상과 옷걸이가 있다. 박 이사가 전무와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나와 최 대리는 그 뒷줄에서 박 이사와 등을 돌리고 앉는다.
오늘은 김 전무와 박 이사가 모두 외부 일정에 참여하느라 사무실에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의 전화를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받았다.
최 대리가 의자를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초승달이 떴대요? 저도 오랜만에 달 볼래요.”
나와 최 대리가 창문 앞에 나란히 섰다. 최 대리의 삼선 슬리퍼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 나도 슬리퍼나 하나 갖다 두어야겠다 싶었다.
“진짜 초승달이 떴네요. 아이가 몇 살이에요?”
“이제 다섯 살. 초승달 보고 오늘은 바나나 같대. 원숭이 꼬리처럼 보인다는 날도 있는데.”
최 대리가 웃었다.
“귀여워요. 요즘 늦게 퇴근하셔서 어떡해요.”
“너야말로 어떡하니. 청춘을 여기서 보내서. 치맥 하고 소개팅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 오늘은 이사님 안 계시니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 택시 같이 타고 가다가 네 오피스텔 앞에서 내려줄게.” 내가 말했다.
“아 맞다. 부장님 그거 아세요? 하긴 모르시겠지만.”
자리에 앉으려던 최 대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뭇거렸다. 궁금해하는 나의 표정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박 이사님, 모건스탠리에서 스카우트 제의받았대요.”
“그래? 넌 어떻게 알았냐?”
“제 친구가 거기 있거든요. 점심 먹다가 우연히 윗분들 말씀하시는 걸 들었대요. 그런데 아마 안 가실걸요.”
“왜? 스카우트면 조건 잘 맞춰 줄 텐데. 미국 회사가 우리 같은 유럽계보다 연봉도 세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IB는 미국 회사와 유럽 회사로 나눌 수 있다. 제이피모건(JPMorgan Chase & Co.),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 씨티(Citi group),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가 대표적인 월가의 투자은행들이다. 영국계인 에이치에스비씨(HSBC)와 바클레이즈(Barclays), 스위스의 유비에스(UBS)와 크레디스위스(Credit Suisse), 프랑스의 비엔피파리바(BNP Paribas), 소시에테제네랄(Societe Generale), 크레디아그리콜(CreditAgricole), 독일의 도이치(Deutsche Bank) 등은 유럽의 은행들이다. 다이와 증권(Daiwa Securities group)이나 노무라(Nomura) 같은 일본 투자은행도 규모는 작지만 괜찮은 편이다.
“이사님이랑 전무님이 영혼의 단짝이잖아요.”
최 대리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야. 이 세계에 영혼의 단짝이 어딨냐. 다 돈 보고 움직이는 거지. 너도 돈 때문에 여기서 개고생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진심을 담아 말해버렸다.
“그렇긴 하죠. 근데 어제는 시간당 월급으로 계산해보니 영 안 되겠더라고요.”
“좋은 자세야. 시간당 월급으로 계산을 해야 효율이 오른다고. 그나저나 전무님 은근히 까다로우시던데 이사님은 9년째 같이 일하신다면서?”
“네. 전무님 빡세게 시키기로 유명하시잖아요. 그전에 전무님이랑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다들 얼마 못 했었대요. 지난번에 이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턴도 줄줄이 그만뒀구요.”
차곡차곡 흐트러짐 없이 쌓여있는 서류, 볼펜 두 자루와 검은색 네임펜 한 개만 들어있는 연필꽂이, 마우스조차 각 잡고 쉬고 있는 박 이사의 책상을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이사님 대단하시네.”
“그러니까요. 그런데 전무님이 일은 많이 던져도 이사님을 잘 챙겨주시는 것 같아요. 이사님이 전무님의 영업력을 더욱 빛나게 하잖아요.”
“그래도 이 업계는 스카우트 제의받거나 이직하면서 직급도 연봉도 올리는 구조인데? 워낙 좁아서 서로 다 안다는 게 좀 그렇지만.”
“그래서 이사님이 못 가실 거예요. 전무님이 가만히 두시겠어요? 승진을 시켜주시든 안되면 DCM 바닥을 떠야 할 것이라고 협박을 하실 수도?”
순진해 보이는 최 대리가 핵심을 찔렀다.
이곳은 빙글빙글 올라가는 나선형의 구조이다. 서로의 사정을 빤히 다 아는 좁은 업계이기도 하다. 누가 어느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지 대충 다 안다. 각 팀의 핵심 인재를 꿰뚫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서로의 인재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된다. 가려는 사람을 붙잡을 때는 연봉협상 또는 승진이라는 두 개의 당근을 흔들어 보인다. 전쟁이 치열하다. 그래, 가끔 뒤끝이 있을 수도 있다.
한때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문과, 그중에서도 경영이나 경제로 몰린 적이 있었다. 뉴욕의 월 가(Wall Street)나 런던의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 홍콩 센트럴(Central), 서울의 여의도나 광화문 일대가 그 아이들이 꿈에 그리던 일터였다. 그 길에 대해 2008년 금융 위기 때 실망하거나 의구심을 품었을 수 있지만 그래도. 뭐,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금융’의 인기가 시들하다. 워라벨을 지향하는 요즘 세대에게 선택받지 못한 탓도 있고, 선망의 일자리가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나 판교로 이동한 탓도 있다. 그쪽이 연봉도 훨씬 세다고 들었다. 어디나 그렇듯, 이 업계에도 총명하고 체력 좋은 젊은 피가 부족하다.
“어서 와 자기. 고생했어.”
아내가 나직이 말했다. 집이 조용했다. 아이들이 결국 잠든 것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웠다. 아이들 방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둘이 똑같이 개구리처럼 엎드리고 자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옆으로 돌린 얼굴 방향도 똑같다. 이불은 그렇게들 좋아하면서도 잘 때는 안 덮는다.
한창 말 많은 다섯 살 딸과 한창 걸음마 하는 아들이 손바닥만 한 집을 부지런히도 어질렀다. 아내는 소리가 나지 않는 장난감들로만 골라서 하나씩 정리하는 중이었다. 만만치 않은 하루를 보냈을 것이었다.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자기, 혹시 이번 주말에 출근해야 해?”
아내가 물었다. 주말에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소리다.
“왜?”
“괜찮으면, 다윤이랑 63빌딩 아쿠아리움에 다녀와 줄래? 물고기 보러 가고 싶다고 몇 주째 노래를 불러.”
“다 같이 가자.”
“다준이가 아직 마스크를 못 하잖아. 변이 바이러스가 그렇게 난리라는데, 마스크도 못 하는 애를 유모차에 앉혀서 사람 많은 곳에 가기는 좀 그래. 둘이 다녀와 주면 좋을 텐데.”
“알았어.”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여의도는 가깝다. 오랜만에 딸아이와 둘이 데이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이제 꽤 대화가 된다. 좋아하는 영양제 텐텐 몇 개와 막대사탕 두어 개만 챙겨가면 그리 힘들지도 않을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63빌딩 아쿠아리움을 검색해 보았다. 할인권이 있길래 미리 결제했다. 주차도 괜찮은 것 같았다. 규모가 크지 않다고 해서 별로 부담되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이니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나섰다. 들어가자마자 수달이 있어서 아이도 나도 한동안 신나게 살펴보았다. 펭귄도 있었다. 겨울이 지나면 펭귄이 남극으로 돌아가냐고 아이가 몇 번이나 물어서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해파리 앞에서는 바다의 나비처럼 예쁘다며 재잘거렸다. 대형 수족관에서 수중 공연을 했다. 수중 공연도 신기할 법한데 아이는 크고 작은 물고기를 살펴보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한 수족관 앞에서 아이가 떠날 줄을 몰랐다. 옆에서 가만히 보니 나도 아는 물고기였다.
“다윤아, 니모네!”
“아빠, 니모가 뭐야. 얘 이름은 흰동가리야.”
아. 아이는 아직 ‘니모를 찾아서’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그나저나 이름이 흰동가리였구나.
“그래? 아빠가 몰랐어.”
“내가 어젯밤에도 엄마랑 열심히 책 읽었는데, 책에 있는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어.”
“신기해?”
“응 엄청. 그런데 말미잘도 같이 있잖아! 책에서도 그랬는데!”
“말미잘이 왜?”
“아빠는 그것도 몰라?”
나는 왜 다섯 살짜리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작아지는지 알 수가 없다.
“저기 보이는흐물거리는 막대기 같은 게 말미잘이야. 근데 쟤는 엄청 센 독이 있대. 다른 물고기들은 말미잘 가까이에 오면 다 죽는대. 흰동가리만 빼고 말이야.”
“오 그래? 어떻게?”
“엄마가 어제 읽어줬는데…. 뭐라 했지…. 흰동가리 몸이 끈끈하대. 그래서 독이 안 통한다고 그랬던 것 같아. 내 생각에는 흰동가리만 말미잘 마음에 쏙 든 거 같아. 음, 난 오늘 아빠가 맘에 들어. 그런 거지.”
아이는 입을 옆으로 벌리며 ‘끈끈’하다는 단어를 발음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말미잘'도 어려운지 여러 번 반복했다.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
“오 그렇구나.” 아이의 강의를 들으며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흰동가리는 말미잘 속에 꼭꼭 숨어라를 하고, 말미잘은 흰동가리가 먹다가 흘린 밥을 먹는대. 서로 짝꿍인 거야.”
짝꿍. 생물의 공생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 입으로 듣는데 문득 김 전무와 박 이사가 생각났다. 과연 박 이사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일까? 그가 만약 이동한다면 아직 업무 파악이 덜 된 나는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죽어라 일하다 보면 그의 빈자리 덕분에 어쩌면 빨리 승진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그건 별로. 그럼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할까? 사람들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연봉이야말로 이 업계에 남아있는 가장 큰 이유일 텐데. 괜찮은 제의를 의리 또는 그들의 공생관계 때문에 거절할까. 아니면 김 전무의 뒤끝을 두려워하는 중일까.
쓸데없이 남의 일이 궁금해져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딴생각을 하다가 혹시라도 사람 많은 곳에서 아이를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이제는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설 때였다.
“어??”
“어? 부장님?? 안, 안녕하세요. 네가 다윤이구나.”
최 대리가 당황하며 인사했다. 최 대리가 비 내리는 토요일 아침부터 아쿠아리움에는 무슨 일인지. 혹시 데이트 중인가 싶어 그의 옆을 슬쩍 보았다.
‘저 사람은…. 씨티 DCM의 윤 전무…?’
본 소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사건,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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