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강 부장이 현금흐름 분석도 잘하고 구조화 상품 스트럭쳐링 경험도 많아서 다행이야. 그쪽 분야에 발도 넓고…. 열심히 해 봐.”
김 전무와 박 이사가 이번 건은 나보고 전담하라고 했었다. 본인들은 잘 모르는 분야라면서.정말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이전 직장에서 구조화 금융(Structured Finance) 업무를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꽤 도움 되었다. 그때 구조화 금융팀의 팀장이 호주인이었다. 그는 그의 아내가 한국인인 덕분인지 나에게 잘해주었다. 나도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그가 좋았다. 그 팀장은 한국 관련 업무가 있으면 나에게 종종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역외 구조화채권 발행이 많은 국가 중 하나이고, 그만큼 중요한 시장이다.
오랜만에 김 전무가 사무실에 있었다. 전무는 내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분위기는 어땠는지, 내가 회의를 리드했는지, 나의 전문성을 어필했는지 등등. 이번 건은 김 전무가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여태 한 번도 함께 일한 적 없었던 발행사라고 했다. 아마도 안 될 것이니 제안서 작성에 너무 힘 빼지 말라고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주관사로 선정되자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이직 후 처음으로 아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사실, 그쪽 해당 본부장이 내 대학 동기야.”
“아, 네.”
“문제는 서로 싫어한다는 것이지. 우리는 동문회에서 만나도 말 안 해. 그래도 공사 구분은 잘하네. 그럼 난 나간다. 일찍 마무리하고 퇴근들 해라.”
김 전무가 검정 코트를 휘날리며 드디어 퇴장했다. 뒷모습이 꼭 영화 셜록에 나오는 주인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배우. 이름이 뭐더라 무슨 오이였는데. 그나저나 오늘따라 김 전무의 ‘딕션’이 유난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에 쏙쏙 박히는 발음,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은 적당한 울림. 듣는 이가 몰입하게 하는 그의 말하기도 영업 비밀 중 하나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 전무님 어디 출신이세요?”
숨죽이고 있던 최 대리가 박 이사에게 물었다.
“고대 경영. 내 선배.”
박 이사가 화려한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치며 대답했다.
“아 맞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최 대리가 종종걸음으로 정수기에 가서 물을 받아왔다. 간식 책상 위에 있던 촉촉한 초코칩 몇 개를 주워오며 내 책상 위에도 얹어주고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위로 쭉쭉 올리다가 둥글게 큰 원을 그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쪽 본부장님과 사이가 안 좋으시다는데 부장님 괜찮으실까요?”
“일하는데 그분들 사이가 나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
나는 가방을 열고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아, 강 부장. 그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네?”
“내가 동문회에서 어쩌다가 들었어. 별일 아니야. 대학 다닐 때 전무님이 그 본부장님께 여자 친구를 뺏겼대. 삼십 년 전 일로 아직도 꽁해 있는 전무님이 좀 웃기긴 하지만, 김 전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사건이었나 봐. 아 근데 그 여자 친구가 그 본부장님의 현재 부인이야.”
“그렇군요.”
웃음이 났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연적은 연적. 남자의 사활을 걸 문제인가 보았다. 김 전무에게 이런 반전 매력이 있다니.
“부장님, 부장님은 형수님이랑 어디서 만났어요?”
최 대리가 일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종일 돌아다니다가 온 나도 그다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동시에 뒤를 힐끗 쳐다보며 박 이사 눈치를 봤다.
“나도 궁금해. 강 부장 이야기 들으며 나도 연애 좀 해보자.”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일하고 있던 박 이사가 말했다.
“와!! 드디어 이사님도 연애하시게요?”
최 대리가 반가워했다.
올해 마흔한 살인 박 이사는 미혼이다. 내가 아는 한 여자 친구도 없다. 최 대리는 박 이사가 결혼도 안 하고 연애도 안 해서 회사에서 사는 것이라고 가끔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박 이사가 매일같이 퇴근을 안 하니 덩달아 최 대리도 집에 못 가고 있었다.
“연고전에서 만났어요.”
“어허, 고연전. 어디서 연고전이라고.”
워킹머신 박 이사가 갑자기 고대생으로 돌아갔다.
“부장님은 아이비리그 나오셨잖아요?”
최 대리가 초코칩을 베어 물며 내 책상 쪽으로 의자를 바짝 당겼다.
“대학 졸업 후에 군대 갔어요. 졸업은 5월, 입대는 그해 11월이었구요. 입대할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맨날 친구들 만나러 다니고 술 마시며 놀았죠. 하루는 연대 다니는 친구가 연고전 데려가 준다고 하길래 따라갔어요.”
“어허, 고연전.”
“네…. 암튼 친구 말에, 보통 그 ‘행사’는 2학년 때까지만 가는데 본인은 동아리 때문에 복학생이어도 간다더라구요. 영상 제작하는 동아리였어요. 그 ‘행사’에 가보니 선수들은 운동경기 열심히 하고, 학생들은 경기를 보는 건지 안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춤추고, 커다란 전광판에서는 서로 비방하거나 자기 학교 자랑하는 영상을 띄우더라구요.”
“맞아. 정확하네.”
박 이사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으나 그가 슬며시 미소를 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영상 동아리 총괄국장이었어요. 그날 잠실 주경기장에 갔는데, 열기가.”
“신나지.”
“신난다는 것보다 훨씬 더요. 혈기왕성한 이십 대 초반 대학생들 몇만 명이 모여서 하루 종일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며 뛰는데, 와. 제 가슴이 다 뛰더라구요. 아, 연대애들은 이상한 주문 같은 것도 잊을만하면 하던데요. 무슨 아라칭 아라쵸 어쩌고.”
“아카라카. 쓸데없는 짓 하지.”
“하하. 저도 그날 배워서 했어요. 참, 연대 쪽에 앉으니 맞은편 고대 학생들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시뻘건 옷 입고 단체로 울렁거리니까 무섭던데요?”
“재미있었겠어요. 저도 가보고 싶네요.”
최 대리가 초코칩을 두 개째 뜯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요즘은 안 해. 코로나 때문에.”
박 이사가 찬물을 끼얹었다.
“응원가는 모르지만 같이 뛰고 놀았죠. 어디선가 나누어주는 연세우유도 받아먹으면서요. 그런데 경기 중간 고대 측 영상에서 김연아가 나왔어요. 그때쯤 김연아가 고대 입학을 확정했었던가 아니면 새내기였던가 그랬거든요.”
“아, 퀸여느님. 모든 고대인이 사랑하지.”
“맞아요. 고대 쪽에서는 난리가 났고 연대 쪽은 순식간에 조용해졌어요. 그때 커다란 카메라 옆에 서 있던 어떤 여자애가 ‘얘들아, 이번 영상은 못 이겨! 앉아서 연아님 보자.’하는데, 순간 눈길이 갔어요.”
“졌군. 뱃노래나 불러줘야겠구먼.”
박 이사가 드디어 의자를 돌려 우리와 마주 보았다.
박 이사에게 이런 면이 있을지 몰랐다. 말수 적은 박 이사가 연고전 이야기에 이렇게 관심을 보일 줄이야. 박 이사에게는 여전히 가슴 뛰는 추억인가 보다. 학벌주의나 폐쇄성의 이유로 연고전이 비판받는다는 말도 들은 적 있지만.
“그날의 열기 때문인지 신나게 노는 모습 때문인지 그 여자애가 자꾸 신경 쓰이더라구요. 옆에서 저를 보고 있던 친구가 ‘쟤는 보도국장이야. 우리랑 동갑이고 애 괜찮아. 현재 남친 없어.’라며 슬쩍 알려줬어요. 그래서 경기가 끝난 후에 연락처를 물어봤죠.”
“오, 부장님!”
“그런데 까였어. 자기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번호 안 준대.”
“쯧쯧쯧. 강 부장 흑역사네.” 처음 보는 박 이사의 표정이었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며칠 후에 친구 통해서 연락처를 받긴 했어요. 고민하다가 전화했어요. 문자는 씹힐 것 같았거든요.”
“성공하셨어요?”
“아니. 고무신은 1, 2학년 때나 하는 거라면서 어떻게 입대를 앞두고 고백할 생각 하느냐고…. 양심 없다고 했어.”
“하…. 군대가 문제죠…. 안타깝네요.”
최 대리가 물을 벌컥벌컥 마셔주었다.
“그래서 그냥 입대했어요. 군대 가서 틈날 때마다 공부나 했죠. 덕분에 제대하면서 CFA 1차 붙고, 바로 취직했네요.”
“형수님의 빅픽쳐였을까요? 2차와 3차는 일하면서 패스하신 거예요?”
“하하하 빅픽쳐. 운이 좋았지. 덕분에 CFA는 땄네.”
흔히들 자격증은 취업이나 이직, 연봉협상을 도와준다고 한다. 나의 자격증도 그런 역할을 해 주었을까. 물어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나의 자격증 공부는 군 시절 도피처 같은 것이었다. 덜컥 1차에 붙고 마무리는 해야지 싶어서 3차까지 갔다. 그 자격증이 일 하는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와서 굳이 의미를 찾아보자면 내가 매우 성실하게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과 고맙게도 그것이 나의 성취경험을 더해 주었다는 것 정도. 성실과 성취경험이라. 그런데 다시 보니 이 두 가지는 내가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일을 시작해서 한동안 정신없었어요. 그러다가 상사 따라서 첫 출장에 나섰는데 인천공항에서 만났죠.”
“형수님을요?”
“응. 신기하게도 서로 알아보았어. 아내도 출장 가는 길이었지.그때 본인에게 직접 전화번호를 다시 받았어. 연락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이번에는 알았다하더라고.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어.”
창밖의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눈으로 좇던 박 이사가 말했다. “인연이네.”
“그렇게 삼 년 반 정도 연애하고 결혼했어요.”
“결혼은 어떤 사람이랑 하나? 난 요즘 그게 궁금하더라.”
“글쎄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저희는 불같은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냥 같이 있으면 편안했어요. 그때도 지금도 이야깃거리가 계속 있구요. 얼마 전에 요즘 유행하는 그 MBTI 검사를 해봤어요. 아내는 INFJ, 저는 INTJ 래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가 봐요.”
“그렇구나.”
박 이사가 말없이 한동안 볼펜을 돌렸다. 최 대리 말대로 이제는 연애나 결혼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나저나 KTX를 타고 다녀왔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앉아 있어 봐야 일도 안될 것 같았다.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나는 저녁 먹을 건데. 밥 먹을 사람?”
박 이사가 오늘의 최고 난이도 과제를 냈다.
“제가 먹겠습니다.”
마음 약한 우리 막내가 손을 들었다.
“그럼 전 집에 가보겠습니다.”
나는 가슴속에 품은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럼 강 부장은 퇴근하고 최 대리는 나랑 15분 후에 나가자.”
나는 다시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박 이사의 뒤통수와 최 대리의 삼선 슬리퍼를 보며 나만 자꾸 일찍 퇴근하는 것 같아서 영 찜찜했다. 그래도 여태 해 왔던 대로, 이 구역의 돌 I는 나라는 마음가짐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하나씩 바뀌는 숫자를 바라볼 때였다. 아차, 다윤이가 회사에서 하리보 젤리를 하나 가져오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귀찮아서 잠시 고민했지만 아이의 반달눈이 뒤집어진 세모눈이 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방까지 들어가기 전에 테이블에서 들고 나오면 될 일이었다. 사원증을 대고 문을 열었다. 내가 나오면서 우리 방 문을 덜 닫았는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면 강 부장 신기해.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내가 전무님 급은 아니지만, 윗사람이 남아있으면 집에 간다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보면 일 다 해놓고 가시던데요. 남으면 집에서 하고.”
최 대리가 쉴드쳐주고 있었다. 이제 정말 나랑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가족이 있어서 그런가. 아닌데, 우리나라 정서에서는 애들이 어려도 남아있긴 하거든. 안타까워서 그래. 강 부장 정도 스펙에, 능력에…. 윗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잘 보이고, 조금만 더 일 많이 하면 초고속 승진도 가능할 텐데 말이야. 별로 야심이 없나. 그런 것도 아닐 텐데….”
야심, 승진, 윗사람, 직장….
박 이사 말이 맞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안 할 뿐이다.
그날 이후로.
본 소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사건,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CFA는 Chartered Financial Analyst‧국제재무분석사의 약자입니다.
사진은 머니투데이의 2012년 9월 14일 기사, [사진: 연고전의 뜨거운 응원 열기]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