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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The Bankers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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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Feb 22. 2022

당신처럼 살지는 않겠다.

소설 The Bankers_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때문에


벌써 여러 해 지났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부모님과 외삼촌 댁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보름 동안의 유럽 출장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오는 길이었다. 아내는 아버지에게 대뜸 셀카를 찍자고 했다. 둘이 앉아서 웃는 모습을, 엄마와 맞은편에서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꽤 늦은 시간에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씻고 잠들었다. 머리맡에 있는 휴대전화가 울려서 알람인 줄 알았다. 엄마였다. 새벽 다섯 시 사십오 분. 나는 잠이 덜 깬 채로 받았다. 엄마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출근 준비를 하다가 화장실에서 쓰러져서 119에 전화했다고. 병원에 도착해서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아내와 일단 일산으로 출발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병원인지 물었다. 응급실에는 한 번에 한 명의 보호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엄마가 밖으로 나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뇌경색이었다. 그래도 일찍 병원으로 왔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엄마와 잠시 교대하고 들어가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침대를 이동할 때,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던 아내는 두 손을 호호 불더니 아버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의사는 스텐트 시술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수술실 앞에 앉아서 기다렸다. 셋 다 공복이었지만 밥 먹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 의사만 나왔다.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두 시간 반이 지났다. 의사가 여러 방법을 써 보고 있지만 역시 잘 안 되고 있다고 했다. 그다음에 의사가 또 혼자 나왔다. 다 실패했다고 했다.

     





실패. 의사는 사진을 보여주며 아버지의 우뇌가 80% 정도 죽었다고 했다. 운동과 감정에 관한 부분이 전멸. 뇌는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재활 치료를 꾸준히 하면 어느 정도 좋아질 수는 있다고 했다. 죽었는데도 좋아진다니. 이 모든 것이 무슨 말인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수술실에서 나와 중환자실로 간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왼쪽 얼굴이, 왼쪽 팔과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왼쪽 몸통은 내 손길을 느끼지 못했다. 누워서 꼼짝도 못 하는 90킬로그램의 대‧소변을 모두 받아내야 했다. 욕창이 생길까 봐 때맞춰 움직여 줘야 했고 죽어버린 왼쪽을 계속 만져주어야 했다.



엄마가 그 옆을 24시간 지켰다. 아내도 함께 있었다. 내가 회사로 출근할 때 아내는 병원으로 출근했다. 나는 가끔 휴가 내고 밤에 병실을 지켰다. 내가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며느리를 붙잡고 그렇게 울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 상황이 기가 막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너에게 이런 짐을 지워서 미안하다며. 나는 두 여자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다행히 좌뇌가 살아있는 아버지는 듣고, 말하고, 쓸 수 있었다. 왼쪽 얼굴이 움직이지 않아 발음이 부정확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내뱉는 감정이 우울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태가 치매인지 섬망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내 아버지와 어떤 대화도 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24시간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엄마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산업재해로 인정받고자 신청다. 과로로 인한 뇌경색은 산재 인정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노무사를 선임했다. 아버지에게 밤낮으로 연락하던 그 회사는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병원은 몇 개월마다 옮겨야 했다. 무슨 정책상의 이유라고 했다. 환자를 도대체 어느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지, 대기가 엄청난 그 병원에 언제 갈 수 있는지, 움직일 수 없는 환자를 대신해서 어떻게 신청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모두 보호자의 일이었다. 엄마는 휴대폰을 붙잡고 살았다. 엄청난 분량의 서류를 매번 준비해야 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텅 빈 눈으로 응급실에서의 기억을 읊조렸다. 수술실로 이동할 때 무슨 주삿바늘이 빠져 있었고 어떤 간호사가 당황했었다고. 아버지의 뇌는 이미 죽었다. 증거도 없다. 의료소송까지 생각할 여력은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보호자가 보호자의 일을 해내려면 간병인이 필요했다. 간호간병통합병실은 극히 드물었다. 간병인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다루기 쉬운 여성 환자를 선호한다고 했다. 이상한 조선족 아저씨, 말만 많은 할머니들과 겨우 인연이 닿았다. 그들은 환자와 보호자 사이를 이간질하기도 했고, 보호자에게 반찬을 해 오라는 과제를 내기도 했다. 햇반과 물, 적당한 간식을 박스째로 사 날랐다. 그들의 업무가 힘든 것은 인정하지만, 수요 우위의 시장에서 그들은 제공하는 노동에 비해 과도한 임금을 요구했다.

      


시간이 흐르자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던 입원 생활도 할 수 없었다. 통원 치료는 한동안 가능했다. 집으로 올 때쯤, 엄마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방에서 화장실을 다녀올 정도는 해냈다. 기적이었다. 드디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던 날, 엄마도 나도 아내도 했다.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했다.

    





그런데 집으로 오니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물건을 집어던졌고 아버지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서로를 향한 날 선 말은 일상이 되었다.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엄마에게 남자가 생겼다고 했고, 엄마가 돈을 다 가져갔다고도 했다. 버티고 버티다 폭발해버린 엄마가 집을 나가면 아버지가 나와 아내에게 전화했다. 우리의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200통씩 찍혀있었다.



아버지의 오래된 그랜저에 장애인 표시가 붙었다. 장애인. 사람들은 이 단어가 본인과는 상관없는 말인 줄 안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사고나 질병 등의 후천적인 이유, 또는 원인 미상의 이유로 장애인이 되는 사람이 선천적 이유로 그 길을 걷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그래. 나도 뒤늦게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웠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 없이 살아가고 있다. 성인 남성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다녀본 적 있는가. 점차 밖에 나가기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쳐다보는 것은 괜찮다. 아, 지나가는 그들이 ‘나는 선택장애가 있어. 나는 결정장애가 있어.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엄마는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갔다. 매일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했고 매일 죽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이 삶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엄마는 도대체 자식 맞냐며 울부짖었다. 매번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 죽어. 엄마도 죽고 아버지도 죽어버려.’라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점점 엄마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홍콩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IB는 아니었지만 의미 있는 기회였다. IB의 밤낮 없는 업무와 이 지긋지긋한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내를 탈출시켜 주고 싶었다. 엄마를 사지에 버려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우리는 한동안 잠을 설쳤다. 래도 떠나고 보니 우리의 일상이 생긴 것 같았다. 아내가 다시 웃었다. 홍콩에 아이가 생겼다.

 


곧 죽을 것 같았던 엄마도, 아버지도 버텨주었다. 그 모든 감정과 혼란이 시간의 침묵 속으로 스며들었다. 엄마는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고 신부님이 한 달에 한번 집에 와서 기도를 해 주었다. 그 덕분인지 엄마가 드디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새로 사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게도, 걱정을 핑계로 험난한 일상을 반복적으로 말하게 하고 관심을 핑계로 우울해하거나 슬퍼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엄마에게 말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좋은 회사에 다니고 일찌감치 결혼해서 애도 둘이나 았으 무슨 걱정이 있냐고.



엄마는 화가였다.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가끔 물감도 썼다. 혼자서도,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도 종종 전시회를 열었다. 엄마의 삶에 갑자기 닥친 고난과 역경을 그림과 글씨를 통해 치유받고 이겨내는 소설과 같은 삶을 살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글자나 그림이 담겨있던 엄마의 화선지는 엄마 본인이나 아버지가 깨부수어버린 집안의 물건을 치우는데 적절히 사용되었다. 수년 동안 엄마와 함께 전시회를 열던 그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이 삶인 사람이었다. 그 시절 공대 출신으로는 흔치 않게 임원의 자리에 올랐고 연구와 기술개발도 꾸준히 했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뉴스에 나왔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25년을 버티고 외국계 회사의 임원으로 이직했다가, 그 회사가 한국 사무실을 철수하는 바람에 어느 중견기업으로 옮겼었다. 그 중견기업의 회장은 욕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매일 늦게 퇴근했고 토요일에도 공장을 둘러보러 다녔다. 이제는 늙었는지 힘에 부친다고 했다. 우리는 그만두라고 했다. 아버지는 2년만 더 일한 후에 엄마와 스위스에 가서 여생을 보내고 싶고 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바빴다. 가족 여행은 늘 다음에 같이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고모와 고모부들이 달려왔었다. 아버지는 1남 4녀 중 장남이었다. 동생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시집보낼 때도 서운하지 않게 챙겨주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고모와 고모부들은 아버지가 입원한 지 6개월이 지나자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신의 부모님에게도 집을 사 드렸고 매달 생활비를 보냈었다. 당시 여전히 정정하시던 아흔이 넘은 나의 조부모님께서는 자꾸만 생활비가 더 필요하다고 . 아들이 병원에 누워있으니 손자인 내가 돈을 보내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충성을 다했던 회사의 람들은 두 번쯤 왔었다. 입원 후 석 달 정도까지는 아버지의 휴대폰도 바빴다. 불알친구라는 아저씨 두어 명이 가장 오랫동안, 일 년 반쯤까지 와 주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없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연락해 주는 사람도, 기억해 주는 사람. 하루 종일 쉬는 시간이 없었던 아버지의 휴대폰은 이제 알 수 없는 유튜브만 시끄럽게 보여준다. 글쎄, 그들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알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매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 이 비극에서 악역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숨이 막혔다.

     


회사에서 주던 법카나 자동차가 사라진 것은 월급이 사라진 것에 비하면 별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검소한 편이었다. 조부모님의 생활비와 병원비에 나의 비싼 미국 대학 학비까지 대 주고도, 알뜰히 모았었다. 하지만 간병인비에 비보험 치료비와 약값까지 여러 해 동안 지출하다 보니 이제 바닥이 보인다고 했다.



버지는 아파도 병원에 안 가는 사람이었다. 본인은 건강하다고 굳게 믿었다. 줄담배를 피웠과체중에 영업용 골프밖에 안 치던, 비행기를 그렇게 많이 타던 사람이 어떻게 건강을 자신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병원 가는 것이 두려웠을까. 어쨌든 나는 아직도 아버지를 보면 화가 난다. 왜 저런 초점 없는 눈으로 앉아있냔 말이다. 왜 엄마를 저렇게 살도록 하느냔 말이다. 그래, 안다. 좋은 학교도 보내주었고 결혼도 시켜주었으니 아버지는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을. 부모가 되고나서 알았다. 자식을 이렇게 키워내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내가 불평 따위 감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런데 모르겠다. 왜 이런 일이 벌어져서 나의 엄마부터 아이들까지 오늘도 이 힘겨운 싸움에 동참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 마음에는 여유가 없다. 대신 서울로 다시 이직은 했다.



처음으로 아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그날 이후, 나는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돌 I가 되어 당당하게 퇴근한다. 휴가를 일찌감치 계획하고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갈 생각을 한다. 소중한 이들이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 바쁘다는 핑계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 한다. 돈을 좀 덜 모으더라도 뒤늦게 병원에 쏟아붓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하지만 흘러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참, 무엇보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새벽에 뛰고 출근한다. 나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번 주말에는 오니? 네 아부지, 애들 오기만을 기다리신다.”

“토요일에는 일이 있어서 출근해야 하고…. 일요일에 생각해볼게요.”     

퇴근길 엄마의 전화였다.



애들 오기만을 기다리신다.



가면 뭐하나.


  

아. 나는 아직도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본 소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사건,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IB는 Investment Bank‧투자은행의 약자입니다.

사진은 Pexels에서 검색하여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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