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구급차 안에는 인큐베이터째로 실려있는 아기와 나, 둘 뿐이다. 태어난 지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은 아이의 울음은 힘이 없다. 길에는 차가 가득하다. 조금만 더 버텨라 아가야.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인큐베이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커다란 침대가 생겼다. 그 위에 아버지가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들을 꿈에서 만난다. 구급차를 두 번 타 보았다. 아들이 태어난 지 이틀째에, 그리고 재활병원에 있던 아버지의 상태가 악화되어 다른 병원으로 가던 날. 사람을 살리는 구급차이지만 그곳에 타 본 경험이 썩 좋지는 않았다.
새벽 네 시 반. 이렇게 깨면 다시 잠들기가 어렵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메일을 읽다가 미국 시장 상황을 확인했다. 이럴 바에 출근이나 하자 싶어서 살금살금 샤워했다.
“벌써 가려고?”
물소리에 잠이 깬 아내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잠이 안 와서 일이나 하려고. 일찍 퇴근할게.”
“아침은?”
“생각 없어. 이따가 먹지 뭐.”
“그래도 뭐라도 먹고 가지….”
“애들 깨겠다. 어서 들어가서 다시 누워.”
서둘러 옷을 입고 현관문을 살짝 닫았다. 문이 닫힐 때까지 아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내는 내가 잠을 설친 이유를 안다.
청량한 새벽 공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와서 머리를 번쩍 깨워주었다. 몸은 추웠지만 오히려 콧노래가 나왔다. 어느새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여섯 시 오 분. 유리문 너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최 대리가 지난밤에 불을 안 끄고 퇴근했었나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정수기 앞에 김 전무가 꽃을 안고 서 있었다.
“전무… 님?”
“어? 강 부장! 일찍 왔네. 이것 좀 들어봐.”
“아 네.”
나는 얼른 꽃을 받아 들었다. 김 전무는 테이블 위에 신문지를 툭툭 깔더니 어디에선가 꽃가위를 들고 왔다.
“여기 내려놔.”
“네.”
“꽃 다듬어 본 적 있어?”
“아내가 하는 것을 본 적은 있습니다.”
“줄기를 사선으로 잘라 주어야 꽃이 물을 잘 먹고 오래 버티는 거 알지.”
“네. 그렇게 자르더라고요.”
“내가 별일 없으면 수요일마다 이렇게 사서 와. 회사 오는 길에 고속버스터미널 꽃시장에 들러. 아무도 모르게 했는데 오늘 강 부장에게 들켰네.”
경제 신문과 잡지가 가지런히 서 있는 원목 선반 옆에 있는 길쭉한 도자기 화병. 그 화병에 매번 꽃을 꽂아두는 사람이 김 전무였다니. 나는 미화팀의 누군가가 해 두었겠거니 생각했고 사실 별 관심도 없었다.
“여기 꽃이 있는 건 알았어?”
“네. 문 열 때마다 봤습니다.”
“어느 날 사무실이 너무 삭막하게 느껴지더라고. 너희들이 하루 종일 있는 곳인데 이래서 되겠나 싶었지. 고속버스터미널 꽃시장 간판이 눈에 들어오길래 한번 가 봤었어. 새벽에 시장 가본 적 있어? 꽃시장이든, 가락시장이든, 노량진 수산시장이든 한 번 가봐. 그곳이 진정 삶의 현장이야. 생동감이 넘쳐.”
시장에 마지막으로 가본 것이 언제였던지. 예전에는 아내와 노량진에서 회를 떠서 일산으로 가곤 했다. 아버지께서 회를 좋아하셨다. 김 전무가 몇 번의 가위질 끝에 꽃꽂이를 완성했다. 솜씨가 꽤 훌륭했다.
“시장에서 꽃가위도 팔고 어떻게 꽂으면 되는지도 알려주더라. 이제 단골집 생겨서 알아서 잘해 줘. 계절감 가득하게. 어때, 좋지?”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노랗고 하얀 꽃들이 싱그러운 초록 줄기와 함께 화병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김 전무 덕분에 사무실에도 봄이 왔다.
“그래. 강 부장은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사무실에 나왔어?”
우리 팀은 주로 아홉 시 십오 분에서 삼십 분 사이에 출근한다. 해외 시장 일정에 맞추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퇴근이 늦으니 출근이라도 천천히 하라며 김 전무가 배려해 준 덕분이었다.
“잠이 일찍 깨서요. 다시 잠도 안 오고….”
“여기 앉아서 커피나 한잔할까?”
김 전무가 네스프레소 머신에 캡슐을 넣었다. 본인은 라떼를 좋아한다며 우유 거품도 냈다.
“강 부장이 우리 팀에 온 지 이제 여덟 달쯤 되었지? 할만해?”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상사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이 나와 같이 대답할 것이다.
“하고 싶었던 말이나 궁금한 건 없어?”
하고 싶었던 말이라…. 글쎄 딱히 없었다. 업무도 꽤 적응했고 팀원들과도 불편하지 않게 지내고 있었다. 궁금한 것. 궁금한 것을 정말 물어봐도 될까.
“궁금한 것을 말해보라 하시니 있긴 합니다만….”
“말해봐.”
“전무님께서는 술과 담배를 안 하시고 골프도 안 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흔히 이 세 가지를 영업의 3요소로 꼽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강 부장이 궁금하다고 해서 긴장했더니 쉬운 거였네.”
쉬운 것이라고 말하며 웃는 김 전무의 대답에 당황했다. 그의 비결이 얼마나 궁금했는데.
“젊었을 때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어. 근데 그놈의 술과 담배 때문에 많이들 고생하더라고. 밤낮으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혹사시키는데 뭐하러 안 좋은 걸 더하나 싶어서 그냥 끊었어. 친구들이 독한 놈이라고 욕했지. 술은 그래도 가끔 해. 골프는 재미가 없더라. 난 차라리 테니스가 낫던데? 그리고 술, 담배, 골프가 영업의 3요소라니. 너무 구시대적이다. 강 부장.”
“아 네….”
“싫은 것을 안 하기로 한 대신 잘해야 하는 것에 집중했지.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려고 노력했어. 말을 정확하게 하고 글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도.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겠어? 매일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해. 지름길은 없어.”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는 기본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김 전무가 수정한 제안서나 PPT를 받아볼 때마다, 어쩜 이렇게 깔끔하게 글을 쓸까 싶어서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어 선택도 훌륭했다. 말할 때는 어떻고.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의 말하기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그 비결이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었다니. 특별한 비결을 기대했던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나는 매일 여섯 시에 출근해서 여덟 시 반까지 여기 앉아 있어. 확인해야 하는 이슈를 구석구석 찾고 그날 할 일을 정리하지. 너희들이 오기 전에 나가지만.”
“왜 나가세요?”
“내가 일찍 와서 앉아 있어 봐라. 아무리 아홉 시 반까지 출근하라고 해도 그럴 수 있겠어? 하나씩 점점 더 일찍 오겠지. 그리고 아침부터 윗사람 얼굴 봐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김 전무. 사람이 다시 보였다.
“헬스 하고 사우나 갔다가 만나야 하는 사람을 찾아가. 회의 참석할 때도 많고. 핵심 인사들의 개인사나 대소사 정도는 언제나 업데이트되어 있어야지. 상황 봐 가며 메시지만 보내거나 전화 한 통만 하기도 하고, 가서 차 한잔 마시거나 밥을 먹기도 해. 필요하면 작은 선물 하나 들고 가. 근데 비싸거나 좋은 건 안 돼. 요즘 엄격하잖아. 그런 건 차별화도 안 되고.”
“그러면요?”
“음…. 그 사람이나 가족의 취향을 알고 있으면 좋지. 추억을 불러일으킬만한 물건이면 더 좋고. 어쨌든 소소하고 별것 아닌데 받으면 기분 좋은, 그런 것을 찾아야 해. 이런 게 비싼 거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아 네….”
“연애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적당히 밀당하고 시간과 정성을 쏟고. 내가 옛날에 연애에 크게 실패한 적이 있었거든. 절치부심했어. 하하하.”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괜히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해도 도저히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손때. 진심을 다할 수 없는 영업은 못 하겠더라고. 어쩌다 영업왕 소리를 듣지만 좀 특이한 건 나도 인정해. 그럴 땐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지 알아?”
“글쎄요….”
“이 구역의 돌 I는 나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이런 인간이다, 하며 밀어붙여야지. 이때 중요한 건 처음에 말했듯 기본기를 탄탄히 하는 거야. 내 실력이 확실해야 해. 돌 I 질량 보존의 법칙 알지? 우리 조직엔 내가 있으니까 나머지는 다 정상이야.”
김 전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돌 I를 눈앞에 두고도 여태 알아보지 못했다니.
“그리고…. 나 혼자 백날 잘하면 뭐하냐. 나름 너희들에게 신경 많이 쓰는데 못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
“아,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전무님.”
“고마운 것도 없으면서. 지나고 보니 사람 귀한 줄 모르면 다 소용없더라. 너희들 하나하나 우리 팀으로 모을 때 고민 많이 했다. 서로 보완하며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어. 여기서 일개미 그만두더라도 형 동생 하며 만날 수 있도록, 나는 노력해.”
전무는 사무실에 있을 때면 항상 점심이나 저녁을 비싼 것으로, 개인 카드로 사 주었다. 잘 먹어야 일할 기분도 난다고 했다. 우리가 외부 회의에서 기분 상하는 일을 당하고 돌아오면 그쪽에 꼭 한마디 해 주었다. ‘을’의 수장이 ‘갑’에게 말을 덧붙이기가 쉽지는 않을 것임에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최 대리나 내가 작성한 문서가 성에 차지 않을 때도 화내는 법은 없었다. 수정해야 할 부분과 수정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 주었다. 사무실에는 없어도 각자가 어떤 업무를 어디까지 진행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평범한 듯해도 만나기 쉽지 않은 꽤 괜찮은 상사였다. 박 이사가 모건스탠리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친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뭐….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해보자면 때깔?”
“네?”
“은행원은 모름지기 기름기가 좔좔 흘러야 해. 깔끔하게 하고 다녀야 떡 하나 더 주고 싶지. 우리 애들은 수트빨 괜찮으니 때깔 걱정은 안 하지만.”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김 전무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자리를 비켜주려고 일어서려는데 김 전무가 그냥 앉아 있으라며 손짓을 했다.
“여보세요? 아 사무실이야. 이따 오후에 가자 그럼.”
휴대폰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왠지 조금 긴장했다.
“사진 보여줄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긴 생머리에 늘씬하고 육감적인 몸매의 여자였다. 김 전무도 어쩔 수 없구나 싶은 생각이 몰려오던 때였다.
“우리 딸이야. 딸 하나 키우는 것 알고 있었어? 얘 때문에 내가 육 년 동안 기러기 했어. 다행히 작년에 파슨스 디자인스쿨 합격시켜놓고 아내가 돌아왔지. 근데 애가 한 학기 하더니 코로나 때문에 학교생활 제대로 안 된다고 휴학하겠대. 한국 들어오고 싶다고. 그러라고 했더니 순식간에 비행기 표 결제하더라. 내 마일리지 써서 업그레이드도 하고 참 나.”
“아 네. 따님 눈매가 전무님 닮았습니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숨을 내쉬며 적당한 말을 찾았다.
“대학 가자마자 휴학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니 내 속이 시커멓다만 얘 말대로 코로나 때문에 영 신경 쓰이긴 했어. 요즘 내 때깔을 위해 전속 코디네이터로 활동 중이셔. 가족이 다 집에 있으니 참 좋아. 아 그리고 딸은 원래 아빠 닮잖아. 하하하.”
김 전무는 딸 이야기를 하며 가장 즐거워했다. 이제 나가야겠다며 일어서다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강 부장. 저 그림 봤어? 저것도 내가 분위기 좀 바꿔보려고 하나 사서 걸어놨는데 영 마음에 안 들어. 혹시 아는 사람 중에 그림 그리는 사람 없어? 이왕이면 나이 좀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삶의 깊이가 느껴지면서도 따뜻한, 뭐 그런 그림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