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The Bankers 09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별 Mar 04. 2022

봄나물 가득

소설 The Bankers_너만 몰랐나 봐


“김 전무 있어? 김 전무!! 아니지, 박 이사!!”     



누군가 쿵쾅쿵쾅 걸어오며 복도에서부터 소리를 질렀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조차 삼켜버리는 저 복도가 이 정도 울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일로 우리 팀을 찾는 것인지. 다행히 김 전무는 자리에 없었다. 최 대리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박 이사는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외부인이 거의 들어온 적 없는 우리 방의 문을 인사팀장이 벌컥 열면서 씩씩거렸다.     



“김 전무 어디 갔어?”

“오늘 휴가 내셨습니다.”

박 이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박 이사. 어떻게 우리 황 대리를 데려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네???”

내 옆에 서 있던 최 대리가 눈이 빠져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대신 대답했다.     



“우리 황 대리, 일 잘하지, 싹싹하지, 예쁘지. 내가 엄청 아끼는 거 알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를 박 이사가 참나. 우리 황 대리 아까워서 내 속이.”

“아 네…. 죄송합니다.”

박 이사가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최 대리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사팀장과 박 이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죄송한 일은 아니고. 축하해. 축하한다고.”

“네???”

이번에는 박 이사가 깜짝 놀라서 자라처럼 목을 쭉 빼고 인사팀장을 쳐다보았다.     



“아니 뭐. 내가 솔직히 너희 김 전무를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서 이 핑계로 한번 소리치려고 오랜만에 여기까지 달려왔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자리에 없네? 어쨌든 축하해. 이야기 듣자마자 우리 황 대리 생각에 속이 상하긴 했어. 그래도 박 이사, 우리 인연도 꽤 오래되었잖아. 박 이사에겐 잘된 일이지. 축하해주고 싶어서 뛰어왔어.”     



잔뜩 화난 줄 알았던 인사팀장이 얼굴을 펴고 웃으며 말했다. 웃으면 포켓몬의 ‘꼬부기’처럼 귀엽다며 인사팀에서는 눈과 입이 유달리 큰 그의 별명을 꼬부기로 붙였다고 했다. 꼬부기의 온화한 미소 덕분인지 우리는 순식간에 무장 해제되었다. 본투비 강남스타일인 깐깐한 김 전무와 달리 인사팀장은 수더분한 시골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김 전무와 인사팀장이 왜 앙숙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둘의 매력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팀장님.”

“우리 황 대리 데려가서 마음고생시키지 말고 잘 살아. 얼마 안 남았다면서? 황 대리가 다음 주에 청첩장 준다던데, 준비 잘하고. 그럼 난 간다.”

“고맙습니다. 다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인사팀장이 떠난 후의 정적은 최 대리가 채웠다. 최 대리는 박 이사에게 도대체 언제부터 연애했는지, 어떻게 본인은 모르게 할 수가 있었는지, 언제 결혼을 하는지 등 뭉게뭉게 피어나는 물음표를 속사포처럼 뱉어내었다. 박 이사는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최 대리가 불현듯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부장님. 부장님은 왜 안 놀라세요? 설마…. 알고 계셨어요?? 너무하세요! 어떻게 저에게만 말씀을 안 해 주실 수 있어요??”

“미안해…. 내 일이 아니어서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어.”

흥분한 최 대리 앞에서 나도 박 이사처럼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최 대리의 반응이 재미있었지만 최대한 담담한 척했다.     



“강 부장에게 비밀이라고 부탁했었어. 미안해 최 대리. 내가 다음에 맛있는 것 사 줄게. 강 부장과 투자자 미팅 준비 잘하고 있어. 이번에는 공기업이지만 다소 특수성이 있는 것도 알지? 질의응답 슬라이드 잘 정리하고 메일로 보내줘. 나는 회의 끝나고 바로 퇴근할게.”     



박 이사가 외부 일정에 참석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했다. 최 대리는 여전히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박 이사가 나간 후 나는 최 대리를 다시 달랬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그래도 이사님이 결혼하면 우리가 조금 더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내가 오늘 맛있는 거 해 준대.”     



아내는 최 대리를 데려오라고 했다. 가까운 곳에서 혼자 사는 최 대리가 최근에 장염을 두 번이나 앓았다는 말을 하자 집밥이라도 제대로 먹여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최 대리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에 신세를 질 수는 없다며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싫지 않은 눈치길래 한 번 더 말을 꺼냈더니 다윤이에게 줄 포도 맛 젤리를 사 두었다고 했다. 퇴근길 내내 최 대리는 박 이사 결혼 소식의 충격과 나에 대한 깊은 배신감에 빠져 있었다.     






엄마! 그 삼촌도 왔어!”

다윤이가 방방 뛰며 반겨주었다. 다준이가 옆에서 손뼉을 쳤다.

“어서 오세요. 짐은 여기 내려놓으시구요. 손 씻고 아이들과 조금만 놀아주시면 금방 차릴게요.”

아내가 최 대리에게 인사했다.     



식탁을 슬쩍 살펴보니 불고기와 냉이 된장국이 있었다. 메뉴를 고민하던 아내에게 젊은 남자들은 고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반영해준 모양이었다. 아내는 봄이 왔으니 봄나물 맛도 한번 봐야 하지 않겠냐고 했었다. 생선 굽는 냄새도 나고, 밥솥에서는 밥이 다 되었다고 뻐꾸기가 울었다. 최 대리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저와 아이들은 먼저 저녁 먹었어요. 편하게 드세요.”

아내가 아이들을 놀이방으로 데려가며 말했다.

“와, 얼마 만에 먹어보는 집밥인지 모르겠어요.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최 대리가 숟가락 가득 밥을 담다. 불고기뿐만 아니라 조기구이와 냉이국까지 맛있게 먹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남자들은 나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내에게 말했었는데, 최 대리는 아내가 혹시나 하며 준비해 둔 달래오이무침과 쑥 전도 밖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이라며 잘 먹었다.     



“삼촌 이것 봐라~ 나 유치원 다녀!”



오랜만에 집에 손님이 오자 다윤이가 즐거운지 자꾸만 식탁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장난감을 하나씩 가져와서 보여주다가, 이번에 유치원에서 받은 가방을 메고 또 자랑했다. 다준이가 다윤이의 유치원 가방을 가져가려고 하자 ‘너는 내가 쓰던 어린이집 가방 줬잖아!’라며 서열정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최 대리가 웃었다. 다윤이는 더 신나서 최 대리 주변을 맴돌았다.      



“어? 삼촌도 가방 있네?”

다윤이가 최 대리의 카키색 백팩을 발견하고는 만지작거렸다.      

“다윤아. 다른 사람 물건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어느새 아내가 따라 나왔다.     



“괜찮아요. 응. 삼촌 가방은 무거워.”

밥을 거의 다 먹은 최 대리가 말했다.

“내 가방에는 식판이랑 물통이 있어. 삼촌 가방에는 뭐가 있어?”     



최 대리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열어보지도 않으면서 매일 열심히 들고 다니는 그 가방이 나도 궁금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최 대리가 대답했다.     



“책이 있어. 그래서 무거워.”

“아, 그렇구나. 다윤이도 그림책 보러 가야지.”     



아이들이 다시 놀이방으로 들어간 사이 아내가 식탁을 정리하고 딸기를 내주었다. 며칠 전에 내가 사둔 맥주 몇 캔도 함께 꺼내 주었다. 아내는 홍콩에서 지낼 때 꽤 아팠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의 미국인 상사 부인이 집으로 초대해서 맛있는 저녁을 해 준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며, 그 생각이 나서 최 대리를 초대했다고 말했다.      



아프 서럽다는 게 문제예요.”

최 대리가 말했다. 이번에 장염으로 응급실까지 갔었으니 많이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래. 우리 삼촌님 가방에는 어떤 책이 있어?”

나는 화제를 바꾸어 보았다.     



“음…. 보여드릴까요?”

최 대리가 가방을 열었다. 최 대리 가방에서 나올 책으로 나는 재테크 서적이나 자기발서 정도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수능’ 기출문제?     



“회사 생활이 힘들어서요. 우리 팀은 좋은데 워라벨이 없잖아요.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한의대를 가 볼까 싶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이해하는데…. 너는 우리나라에서 중‧고등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능이 어려울걸? 그리고 이제는 기회비용도 생각해야지.”



나는 둘러말하지 않았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수능을 다시 보고 진로를 바꿔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직장인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네…. 맞아요. 저는 수능형 공부를 안 해봐그런지 너무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몇 달째 저 문제집이 가방 안에만 있어요. 고민이에요.”

“한창 고민할 때지. 대출 생기고, 아이까지 낳으면 그런 고민을 할 여유도 없더라. 치열하게 고민해.”

“수능은 제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창업도 생각해보긴 했었어요.”

“남의 돈을 받을 때는 워라벨이 없지만 내가 돈을 만들 때는 워라벨 같은 것을 따질 겨를도 없. 그래도 내가 보기에 너는 수능보다는 창업이 훨씬 나아 보여. 시대의 흐름에 딱 맞는 컴공 전공이잖아. 앱이든 게임이든 웹사이트든, 잘 한번 생각해봐.”     



맥주를 마시며 잠시 말없이 있던 최 대리가 입을 열었다.     



“네. 사실…. 얼마 전에 부모님이 결국 이혼했어요. 두 분 사이의 일이니 직접적인 원인은 몰라요. 예전에 제가 봤던 그 일 때문인지 아니면 뭐가 더 있었는지요. 이혼했다고는 하지만 주로 따로 살았으니…. 아빠가 엄마에게 위자료를 좀 줬대요. 엄마는 그 돈 필요 없다며 제가 더 공부하고 싶으면 학비와 생활비로 쓰라고 했어요. 그래서 한의대를 생각했었는데…. 창업 자금으로 사용할 방법도 고민해볼게요.”     



마음이 무거웠다. 최 대리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면 해 줄 말이 없었다. 훌륭한 직업을 가진 부모와 잘 자란 아들. 소위 상위 몇 퍼센트라는, 행복한 가족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이들은 왜 슬픈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슬프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선입견일까. 최 대리의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 것은 나의 편견일까.      



“그래. 신박한 아이템 생각해서 한번 추진해봐. 최 대리 말고 최 사장님 하자고. 내가 물심양면으로 응원하고 지원할게!”



최 대리의 맥주캔에 나의 캔을 갖다 대며 말했다. 뭐가 되었든, 최 대리가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아. 그래서 박 이사님 결혼식은 언제래요?”     



쉬가 마렵다고 뛰어가던 다윤이가 갑자기 말했다.

“삼촌~ 나 그 삼촌 결혼식 때 꽃 안고 간대~”

“뭐야? 다윤이도 알고 있었어요?? 다윤이가 화동해요?? 저만 몰랐어요, 진짜??”     



최 대리의 분노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내는 조용히 맥주를 더 갖다 주고 아이들을 재운다며 들어갔다. 최 대리, 미안. 생각해보니 너만 몰랐나 봐.




본 소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사건,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사진은 Pexels에서 검색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전 08화 꽃을 든 남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