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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 Feb 24. 2023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 음식과 청춘에의 위로를 담아

[계절영화 #사계절]

* 본 게시글은 지난 초겨울 작성된 글입니다.

* 본 게시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올해의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길에서는 어느 골목에서 붕어빵을 발견할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에 발걸음을 옮기게 되고, 지난겨울의 장갑을 어느 옷장 구석에 끼워뒀더라 떠올리는 계절이 찾아왔다. 자전거를 타기에는 손이 시린 날에, 따끈한 국물의 수제비에 갓 구운 배추전이 생각나는 밤이 길어졌다. 원래라면 계절의 흐름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제철 식재료를 찾아 스스로를 위한 밥상을 챙겨 먹게 만든 영화가 있다.


오늘은 "계절 영화" 시리즈를 시작하며, 눈이 소복이 쌓인 한겨울로 시작해 사계절을 다루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혜원의 사계절 음식이 담긴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C) 영화사 수박 / 네이버 영화


눈이 내려 새하얘진 시골길을 걸어 집으로 들어온다.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불 꺼진 집에 들어선 착잡한 표정의 혜원(김태리). ‘집이다-’라는 느낌으로 드러누워 보지만 곧바로 추위에 손을 비비며 일어난다. 난로에 불을 피워 추위를 해결하고 나니 배가 고파온다. 사람 흔적이 오래돼 보이는 집에 먹거리라고는 양념뿐이지만 운 좋게도 쌀독에 남은 쌀을 발견했다. 활기가 도는 표정으로 마당으로 나가 눈에 파묻힌 배추 밑동을 잘라낸다. 메말라가는 파도 뜯어 와 배춧국을 끓인다. 뜨끈한 음식을 기분 좋게 먹고는 등 따시게 방에 누운 주인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몰래 배시시 웃음이 지어진다. <리틀 포레스트>는 그런 영화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만드는 사계절 음식, 동네 친구들과의 소소한 일상을 보고 있자면 마음에 평온함이 퍼지는 게 절로 느껴진다.


새들 지저귀는 소리 가득한 따스한 봄을 지나, 매미 소리 시끄러운 여름은 폭우와 함께 물 흐르듯 흘러가고, 들판이 노랗게 물들고 주홍빛 열매들이 가득한 가을, 곶감이 맛있어지는 차갑고도 포근한 눈 내리는 겨울이 담겨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계절에 맞는 제철 채소로 주인공 혜원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기억 속 엄마의 레시피와 함께 봄에는 양배추를 가득 넣은 샌드위치를, 꽃을 얹은 파스타를 해 먹는다. 여름에는 오이를 국수 대신 쓴 콩국수를, 가을이면 전을 부쳐다 만들어둔 막걸리를 기울인다.


하지만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진정한 매력은 따스함 속에 숨겨둔 ‘혜원’이라는 청춘의 삶에 대한 고민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유독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밤이면 찾게 된다. 세 차례나 그렇게 같은 영화를 같은 이유로 감상하고 나서야, “이 영화를 보고 혼자 집에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지 뭐야? 그런데 이 영화, 이상하게 계속 눈물을 흘리며 보게 돼”라며 영화를 추천해 준 친구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겪었던 것만 같은 친구들과의 일상을 어른으로서 살고 있는 혜원 (C) 영화사 수박 / 네이버 영화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진짜 배고파서”
‘인스턴트 음식은 나의 허기를 채우기는 부족했다. 배가 고파 돌아왔다는 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혜원은 시험에서 떨어지고 고향으로 왔다. 눈이 내린 겨울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한없이 착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집에 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 금방 갈 거예요. 한 사나흘?” “나 금방 올라갈 거야.” 처음 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온 것을 창피해하기라도 하는 듯, 금방 서울로 돌아갈 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남자친구에게도 자신이 말없이 고향으로 내려온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친구 은숙은 회사 부장 때문에 스트레스가 한계에 다다랐다. 이에 “정 그러면 그만두든가. 스트레스받아 죽을 거 같으면은 그만두는 게 낫지”라는 혜원의 말은 은숙의 서러움에 불을 질렀다. “그만두고 갈 거면 왜 고민을 하겠냐. 그냥 친구 편들어주고, 토닥토닥하는 척.” 결국 내뱉고 싶을 때 내뱉지 못하고 참은 말들로 속에 독이 쌓인 은숙은 부장의 머리로 탬버린을 연주했다.


재하는 고향으로 아버지의 농사를 이어받겠다며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오며 서울의 전 여자친구에게 그는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인생을 살기 싫다’라고 말했다. 회사 생활을 하던 재하는 온갖 폭언과 욕설을 들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재하는 사무실을 ‘버리고’ 왔다.


“어느 날인가 문득,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터질 거 같더라고.”


서울에서의 혜원은 ‘그저 견디고자 있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사람들에게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조금조금 기간을 늘리며 자꾸만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금방이라도 떠나겠다는 말을 달고 살던 혜원은 “겨울만 보내고 올라가기엔 너무 억울하잖아”라는 말과 함께 점차 고향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려간다. 여름이 되고 난 후에야 혜원은 용기를 내어 남자친구에게 전화해서 말했다. ‘내가 여기로 떠나온 것이 아니라, 돌아온 것이라고 했다는 거.’ 혜원은 그제야 집으로 돌아왔다.


혜원과 은숙, 재하는 청춘들의 삶과 고민을 담고 있다. 혜원은 도망쳤다. 자신의 바라던 목표를 이루는 데 실패한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도망쳤다. 재하 말처럼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그때그때 열심히 사는 척, 고민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은숙은 자신의 상황이 너무도 답답했다. 고향인 시골 동네를 떠나버리고 싶지만, 그러기 위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 부장의 행동은 점점 은숙의 속에 독이 쌓이게 했다. 재하는 버티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자신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너무도 다양한 청춘들이 품고 있는 고민을 극 중의 세 등장인물들은 과거 살아왔거나, 현재 살고 있었다. 그런 고민들이 다른 고민을 품고 있는 청춘의 삶과, 제철 음식과, 사계절의 변화와 어우러져 따스함을 품어냈다.


홀로 조용히 집을 찾는 겨울로 시작해서 어색한 표정이 가득한 봄, 자연스러운 혜원의 모습이 담긴 여름과, 이제야 시원함이 드러나는 가을의 혜원 (C) 영화사 수박 /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 가장 신비하고 알 수 없는 캐릭터인 혜원의 엄마 역시 청춘의 고민을 품고 있었다.


혜원의 엄마는 온갖 다양한 레시피를 혜원에서 전수해 주었다. 마치 본인이 창조해 낸 것처럼 거짓말까지 한 스푼 더해서 말이다. 그런 엄마는 수능이 끝나고 얼마지 않아 갑자기 혜원을 두고 사라졌다. 늦을까 봐 아침을 거르고 바쁘게 학교로 출발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리고 혜원이 돌아온 집에서 잘 살고 있는 어느 평범한 날, 엄마는 뜬금없이 감자빵 레시피를 편지로 보내왔다. 뜬금없이 사라졌던 그때 남긴 편지와 같이 말이다.


우리 혜원이도 곧 대학생이 되어서 이곳을 떠나겠지? 이제 엄마도 이곳을 떠나서 아빠와의 결혼으로 포기했었던 일들을 시도해 보고 싶어. 실패할 수도 있고, 또 너무 늦은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지만 엄마는 이제 이 대문을 걸어 나가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갈 거야.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고 엄마가 늘 말했었지? 지금이 바로 그때인 거 같아. 아빠가 영영 떠난 이후에도 엄마가 서울로 다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지금 우리 두 사람,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 있다고 생각하자.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혜원의 엄마가 보낸 떠나던 날의 편지


엄마가 사라질 때의 편지를 어린 혜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혜원은 엄마의 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도 시도해 보고픈 일들이 있었다. 엄마도 실패가 두려웠고, 새로운 도전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청춘이 품는 고민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대문을 나섰다.


집은 떠나오는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떠나간 그곳으로부터 돌아오는 곳이었다. 어릴 적의 따스함을 품고 있는, 자라온 시간 속에서 배워온 기억을 갖고 있는. 어디로 떠나가더라도 마음 한 편의 작은 숲이 되어줄, 우리가 뿌리내리고 심어진 그곳이었다. 혜원이 음식을 하며 레시피를 기억하고 엄마와의 추억과 어릴 적 이야기들을 떠올리듯이, 언제 어디서든 힘들 때마다 기억하고는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숲. 엄마는 혜원에게 작은 숲을 선물해 주었다.


‘그동안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이 그만의 작은 숲이었다.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


그날 밤 혜원은 엄마에게 답장으로 자신만의 감자빵 레시피를 썼다. 엄마가 만들었던 감자빵과는 다른 자신만의 매력이 담긴 감자빵을 만드는 방법을 담아서. 혜원은 엄마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살지 않았다. 혜원이 찌는 떡은 엄마의 떡보다 짜지 않은 듯 짠맛이 있었다. 감자빵은 조금 더 감자의 포슬포슬한 식감을 살리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혜원은 엄마가 심어준 작은 숲의 뿌리에 자신만의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었다.

(C) 영화사 수박 / 네이버 영화


영화를 세 번이나 이유를 알지 못 한 채 잔잔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감상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유독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밤이면 생각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삶의 다양한 고민들을 '괜찮다, 이겨낼 수 있다'라는 말로 서투르게 등을 떠밀지 않는다. 다만, 같은 고민을 품은 혹은 품었던 혜원, 은숙, 재하,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와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들어가는 혜원의 모습으로 따스하게 품어줄 뿐이다.


살다 보면 참 많은 기억을 잊고 살고는 한다. 특히 바쁜 현실에 치여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면 어릴 적 기억들은 영화 속 장면처럼 남의 이야기로 느껴지고는 한다. 하지만 모두 우리가 살아온,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준 소중한 마음속 작은 숲이다. 우리가 힘들 때면 그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떠올리며 다시 대문 밖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는 작은 숲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8)

임순례 감독, 영화사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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