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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Dec 24. 2023

26. 술 깨는 새벽은 고통스럽다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깜깜한 새벽.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려 눈을 떴다. 그 전날 술이 과하면 매번 겪는 현상인데도,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과음을 하게 된다.


아버지도 그렇게 술을 드셨을 것 같다. 자주 술에 취해 들어오셨고, 어머니는 어린 나를 앉혀 놓고 머리를 긁어 보라고 시키셨다. 앞쪽을 긁으면 아버지가 일찍 귀가하시고, 뒤쪽을 긁으면 늦게 들어오신다던가. 어린 나는 계속 뒷부분을 긁어대지 않았을까.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하시는 아버지와 가끔 다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오랜 기억 너머에 흐릿한 흑백사진처럼 일렁인다.


어머니가 싫어하시는데 아버지는 렇게 술을 자주 드실까 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늘 의문이었고, 이때 내가 어른이 되면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성인이 되고부터 어릴 때의 다짐을 지키지 못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것도 남동생과는 다르게 나만 아버지의 체질을 물려받았는지 제법 술을 잘 마시는 편에 속했다. 하여 대학 재학시절이나 군 재직시절에도 술 잘 마시는 친구, 이야기 잘 들어주는 친구로 알려졌다.


술을 많이 드신다고 버지를 향해 잔소리를 늘어놓던 어머니도 "너희 아버지는 술을 마실 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단다"라며 어린 나에게 은근히 남편자랑을 하셨다. 지금의 내가 아버지의 술 잘 마시는 체질 외에도 이러한 성정마저 닮았다, 부전자전이라는 단어가 새삼 떠오르며 살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술 먹는 사람흔한 핑계이긴 하지만, 술자리는 사는 이야기, 자랑할 거리, 숨겨놓은 힘든 고민거리를 다 풀어낼 수 있고, 그 결과로 스트레스도 풀리고, 가끔 해결책을 찾아내기도 하고, 서로의 우정이 쌓여가기도 하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직장에 입사한 이후에도 술자리는 선배, 상사들과 친해지는 좋은 무기가 되었고, 어머니와는 다르게 아내는 나의 늦은 시간까지의 술자리를 사회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용인해 주었다.


물론 나이 들어가며 잦은 술자리로 인한 건강악화가 살짝 걱정되기는 한다. 술자리를 함께하던 친구가 암으로 일찍 사망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고, 주변 지인들이 건강이 나빠져 술자리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전해 듣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요즈음은 집안 어른들이나 아내의 잔소리도 있고 해서 술자리를 줄이고 건강관리에 시간을 좀 더 할애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런데도,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힘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연말연시를 축하하기 위해서 등등 술 마시기 위한 핑계와 약속 횟수가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보다 더 많은 사람을 익사시켰고, 전쟁의 신인 아레스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다. 술이 바다나 전쟁보다도 더 많은 사람의 삶을 망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경의 인물 노아도 술에 취해 실수를 하였고, 이로 인해 세 아들 중 하나인 함이 저주를 받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 한잔이 서민 팍팍한 삶에 주는 위로가 생각보다 크고, 힘든 삶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활력소가 될 수 있음이 자명하지만, 술이 주는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음 확실하다.


"우리 100세 되어 가끔 만나, 술도 한잔 하면서 회포 푸는 삶을 살아 봅시다" 어제 늦은 술자리에서 호기롭게 외치며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오늘 새벽 또다시 과음한 술로 인한 두통과 복통으로 잠을 설쳤다.


나의 인생의 시간들이 꽤 흘러갔으나, 아직까지 술을 끊어내지 못하고 제법 많은 수의 밤을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남은 세월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가며, 술 깨는 새벽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친우들과 가끔씩 술잔을 기울이며 한밤을 내고 있을 듯싶다.

출처: 네이버(조반니 벨리니. 술취한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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