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 장인과 육수의 장인
칼국수.
추운 날에 뜨끈한 칼국수를 후루룩 한 대접 마시듯 먹고 나면 후끈후끈해져서 꽁꽁 언 몸이 부들부들한 칼국수처럼 긴장이 풀어진다.
예전엔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칼국수집이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 있었다. 요즘은 칼국수집을 잘 볼 수가 없다.
(요즘은 칼국수 보단 마라탕집을 흔히 볼 수 있다.)
누구라도 부담 없이 들어가 멸치 칼국수에 찰떡궁합인 칼칼한 겉절이를 척 걸쳐 한 그릇 먹으면 훈훈하고 든든해지는 칼국수는 저렴하고 만만한 음식이었다.
가끔 칼국수집을 만나도 가격에 망설이게 된다.
물가의 상승도 있지만 솔직히 나는 칼국수가 비싼 값을 치러야 하면 먹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든다. 내게 칼국수는 그런 음식이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고기가 든 명동 칼국수는 다음 기회 어딘가로 미루고, 나의 옛날 단골 맛집 얘기로 넘어간다.
그 집을 발견한 때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도다. 회기동 경희의료원 바로 옆 좁은 골목엔 작은 칼국수집이 있었다.
4인용 밝은 색의 나무 테이블이 여섯 개쯤이어서 합석이 아주 자연스러운 곳이었다.
이름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아주 평범한 문패에 적힌 이름 같은 어떤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린 늘 “칼국수집 가자” 그랬기 때문에 그냥 칼국수집이었다. 점심시간이면 당시에 점잖은 의사 선생님들이 줄 서는 맛집이었다.
당시 학생식당은 800원~1500원 정도였고, 분식점 또또와의 쫄면은 2500원. 딸기빙수 2000원, 교차로의 백반이 3500원, 그린하우스 빵집의 통식빵 1/3쯤을 잘라 크림을 잔뜩 올리고 전자레인지에 땡 돌려주면 맛이 일품이었던 크림식빵은 얼마였더라?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 정도의 물가였다.
칼국수 가게.
<메뉴>
멸치 칼국수 3000원.
닭칼국수 3500원.
테이블 높이의 낮은 경계선 같은 담너머 정면의 주방은 커다란 스크린처럼 보였다.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었던 활짝 열린 오픈 주방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한 자신감이었던 것 같다.
키가 크고 무뚝뚝한 주인아저씨는 칼국수 면을 손반죽하고 기다란 밀대로 밀어 착착 접어두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가면 이 광경을 볼 수가 있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키가 작고 무뚝뚝한 아주머니는 눈 맞춤으로 대답을 하고,
화로옆 도마에서 국수를 썩썩 썰어 바로 펄펄 끓고 있는 국물에 푹 떠서 작은 냄비에 넣어 끓이셨다.
머리엔 두건을 쓴 아주머니가 허리춤에 손을 짚고, 긴 젓가락으로 칼국수를 설렁설렁 저으셨다.
신기한 건 대답을 안 하는데 아무리 손님이 많아도 주문에 착오가 생기는 걸 본 적이 없다.
잠시 후 빨간 겉절이와 함께 스텐 대접에 한가득 푸짐한 칼국수가 나왔다.
아줌마는 엄마처럼 여러 번 온 손님은 눈대중으로 먹는 양도 조금씩 차이를 뒀다.
누구나 과함도 부족함도 없었다. 물론 맛있어서였지만 잔반 없이 모두 완칼이었다.
닭칼국수엔 엄청난 순살 닭고기가 올라가 있었는데 국물은 기름기 하나도 없이 담백하면서도 진했다.
멸치칼국수는 아무것도 안 들었는데 멸치의 향이 아주 구수하고 비린내 없이 개운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국물이 정말 맛있었다.
(고향의 맛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미리 반죽하여 커다란 상에서 밀가루를 뿌리고 반질하게 윤이 나는 홍두깨로 밀어 만들었던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우리 집 면과 비슷했다.
며칠 내로 또 올 거면서 늘 닭칼과 멸칼이 고민되었다.
아저씨는 면 장인이셨고, 아주머니는 육수 장인이셨다.
가게주인은 무뚝뚝한 가게간판처럼 인사도 없고 표정도 없었다. 손님에게도 두 분도 서로 말이 없지만 업무분담은 철저히 잘하시는 분들이었다.
어떤 날은 두 분이 싸우셨는지 분위기가 더더욱 안 좋았다. 키가 작은 아주머니의 눈꼬리는 올라갔고, 키 큰 아저씨의 입꼬리는 내려가 있었다.
두 분의 대화를 들은 기억이 없어서 부부인지 아닌지도 애매했고, 그런 분위기와 화난듯한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리 맛집이어도 손님을 불편하게 하거나 줄까지 서서 먹는 것은 안 하는데 생각해 보니 기다림과 분위기를 참고 갔던 유일한 음식점이다.
가게 안 공기 중에 멸치나 닭냄새가 날만도 한데 비릿한 향기 하나 없이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은 바닥과 주변의 사람들이 줄 서는 골목까지 청소를 수시로 했고, 테이블과 수저는 반짝반짝하고 깨끗했다.
이른 아침 수업을 갈 때 골목을 스치면 육수를 끓이는 냄새가 나며 두 분의 일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면을 씩씩하게 밀고, 아주머니는 닭살을 찢고 계실 거다. 한결같음에 안심이 된다.‘
두 분은 말이 없을 뿐 부지런했고, 철저했으며 불친절하지 않았다.
한 사흘의 한 번쯤 나의 점심은 그 칼국수 집이었다.
주인이 날 알아보는지 의심하며 나는 그 가게의 단골이라 스스로 생각했는데 내게 이따금 아주머니가 살짝 미소를 보이기도 하실 정도가 되었었다.
한 2년쯤 다니고서야 어느 날
다른 손님이 아무도 없이 혼칼을 하던 날이었다. 한적한 시간 일을 시킨 것 같아 좀 미안하기도 하고, 적막함이 어색했다.
숫기 없던 나는 무슨 용기였는지
“칼국수가 너무 맛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맛이 있어요?”
“멸치 칼국수엔 멸치육수와 닭육수를 반반 넣어요. “
나에게 말을 하시다니 감동이다.
그날 나는 칼국수가 아닌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서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갔으나 칼국수 끓이는 법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나는 뭔가 그분들의 장사 노하우를 지켜드려야 할 것 같은 의리감을 느꼈다.
이후 달라진 것은 아저씨가 나를 보고 웃으시며 인사를 하셨고, 아주머니는 내 그릇에 칼국수 양을 아주 많이 주셨다.
때론 “예쁜 학생, 왔네. 오늘 그 키 큰 친구는 왜 안 왔어?” 가끔은 아주머니의 아저씨를 탓하는 구시렁거림도 들려주셨다.
두 분은 부부가 맞았고, 경상도분이셨다. 그렇게 안부를 물으시며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셨다.
학교를 졸업하고, 칼국수집을 잊고 살았다. 15년쯤 뒤에 찾아갔을 땐 그곳에 칼국수집은 없었다.
분명히 계속 운영하셨다면 대박 난 줄맛집이 되었을 텐데 아쉽고 섭섭했다.
가게를 이전 했을까? 아니면 그만두셨을까?
칼국수 집을 그만둔 이유가 안 좋은 이유가 아니었기를 바랐다.
‘아마 고단하셨을 거야...’
맑은 멸치 칼국수와 고기가 수북하게 올라간 진국 닭칼국수는 내겐 참 그리운 맛이었다.
그 집이 그리워질 때면 아주머니가 선물처럼 슬쩍 던져주신 비법을 참고하여 멸치육수 반, 닭육수 반인 나의 칼국수를 끓인다.
사실 이젠 정확한 맛이 기억나지 않고 내 상상 속의 맛일 것 같다.
칼국수를 먹자고 한 번에 두 가지 육수를 내는 일은 어려우니 닭백숙을 끓이는 날에 육수와 살코기를 남겨두었다가 비법 칼국수를 만든다.
엄마의 반질반질한 홍두깨를 가지고 있지만 엄두가 안 나서 시판 면을 사용한다.
아마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먹고 나면 백숙국물을 넉넉히 만들고 남겨두게 될 것이다.
그분들은 어디로 가셨을까?
내 혼돈의 20대를 따뜻하게 채워준
그 무뚝뚝한 모습 그대로 계셨으면 좋겠다.
‘아, 설마 발길을 뚝 끊은 내가 섭섭했을까?’
* 첨언 : 칼국수와 음식 가격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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