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토닥임
심정이 팍팍하거나
심장에 바람이 휭휭 불거나
아니면 머릿속이 필요이상으로 무겁다고
마음이 소리친다.
그리고 책이 읽히지 않는다. 독서 상태는 마음의 여유 지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용이 심오하여 되돌려 읽기를 반복한 것도 있지만 그 흥미로운 책을 거의 3주나 걸려 독서를 마쳤다.
최근 책을 앞에 놓고선 책 너머 울긋불긋 물드는 앞산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잦다. 그러다가 문득 가장 가까이 있는 식물인 장미허브를 한번 들여다본다.
'울 밑에 선 봉선화도 아닌데 네 모양이 처량하구나.'
식집사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태가 역력하다. 누렇게 말라가는 이파리와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들까지 구석구석 달고 있으니 그 행색이 말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핀셋.
간혹 투박한 손가락으로 갈무리하다 보면 성한 잎까지 뭉청 떼어버리기 일쑤인데 예리함을 자랑하는 핀셋은 아주 유용하다. 반짝이고 끝이 약간 구부러진 핀셋은 아끼는 식물 손질용 도구다.
펼쳐둔 책과 노트북을 치워 책상 위를 말끔히 하고, 작은 화분들을 올린다. 사용한 지 오래됐어도 여전히 반짝이는 핀셋을 알코올로 소독한 후 하나하나 시든 잎을 떼어낸다.
장미허브는 식용이 아니지만 진한 향이 난다. 시든 잎을 걷어내는데도 민트 향기가 퍼진다.
건강한 잎들이 다치면 안 되니 예리한 눈으로 보고 핀셋으로 잘 집어내야 한다. 손 볼 것이 많아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싱싱한 잎들만 남으니 시원하게 통풍이 잘되고 새순이 돋아나기에도 충분한 공간들이 생겼다. 꼬질꼬질하던 얼굴을 세수한 것처럼 초록초록 아주 예뻐졌다.
핀셋을 든 김에 다음은 제라늄 종류인 엔젤아이즈를 책상에 올린다. 한 번도 꽃을 피우지 않았지만 언젠가 꽃을 피울 거라 기대를 한다.
"이 아이도 만만치 않겠군."
하나하나 시든 잎을 떼어내고 지난번 잘라주어 말라붙은 잎사귀 줄기도 떼어준다.
엔젤아이즈는 잎이 무성해서 그야말로 정글 속에서 숲을 헤치며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톡 쏘는 것 같은 허브향과 달리 제라늄에선 또 다른 꽃이 피지 않았는데 꽃내음 같은 특이한 풀향이 퍼져 나온다.
좋은 향기들이 살짝 스친 손에 묻고, 코를 지나 마음에 스며든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해가 중천에 뜨고 아침에 걸쳐 입었던 카디건도 벗어버리고 정교한 작업을 계속 이어나간다. 한 개의 지저분함도 남기지 않고 완벽해졌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이, 예쁘다."
예뻐진 모습을 사진도 찰칵찰칵 찍어준다.
작은 식물 두 개를 세수시키고, 커다란 몬스테라 잎도 하나 잘라주고, 작은 정원을 손보기에 분주했다. 여기저기 가위질도 해주었으니 상처가 아물어야 한다. 그러니 물은 다음날에 주기로 한다.
저 구석에 잠든 채 늦봄과 습한 여름을 지나 초겨울에 접어드는 아직은 흙 안에 잠자고 있는 프리지아가 보인다.
"11월이 시작했으니 구근에 첫 물을 줄까?"
프리지아 구근은 11월 무렵에 첫물을 주고 서늘한 곳에 두면 어느 날 갑자기 연둣빛 싹이 튼다. 그리곤 언제 잠들었었냐는 듯 쑥쑥 자란다. 봄날이 무르익으면 구근 하나에서 하나의 기다란 꽃대가 나와 향기가 진한 노란 꽃을 피운다. 그 여정을 언제 시작해야 할지 고민을 한다.
어느새 아침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내가 이 작업을 왜 시작했더라? 책을 읽지 못하던 혼잡한 마음은 어디로 간 걸까?
잡념 없이 집중하며 예리한 핀셋으로 지저분한 이파리들을 콕콕 집어낼 때 마음의 잡념도 콕콕 집어내었나 보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펼쳐 둔 책을 한 줄도 못 읽었는데 갑자기 노트북을 펼쳐 글 한 줄을 시작한다.
위로가 필요할 때 온몸에 진동이 오도록 등을 두드려주는 묵직한 손길도 좋지만 때로는 작고 섬세한 토닥임이 더 마음 깊숙이 가닿기도 한다.
오늘은 내게 마음을 집어내고 토닥여줄 반짝이는 핀셋 하나가 있으니 살만하다.
마음이 처량해지면 떠오르는 노래 봉선화.
봉선화는 현철의 노래가 아니다.
봉선화
[1절]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2절]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3절]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예 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
* 어딘가 분명히 반짝이는 당신의 핀셋이 있을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