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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저기도 가을 티 내기

보습이 필요해.

by 그사이

여기저기

바삭거리는 가을이 티를 내고 있다.

손끝이 거칠거칠하다.

이러다가 조금만 소홀하면 피를 보겠다 싶어 선호하든 아니든 가릴 것 없이 가성비 좋은 것, 누군가 준 것,

그래도 복숭아 향은 좀 어지럽지만 문질문질 향이 희석되길 바라며 발라준다.

어느새 여기도 핸드크림, 저기도 핸드크림, 가방마다 핸드크림.

내게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내 손.

미팅에 나가 오므리고 있다가 커피잔을 들 때만 잠깐 펴는 내 손가락이 예쁘다고 말했다. 아마도 상상력을 동원한 생각이었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이 없다. 그 말의 중심엔 내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선입견을 가졌었다.

자세히 본다면 부끄러운 내 손.

손톱에 치장도 없이 연습을 위해 매일 짧게 자르는 뭉툭한 손톱과 마디가 굵은 내 손.

사춘기에도 여드름이 나지 않았던 좋은 살 성을 가진 것은 은근한 자랑거리였다. 게다가 감사한 유전자인 흰빛을 부러워하는 이들은 많았다. 젊은 날에는.

그러나 굳은살이 생기지 않고 말랑이는 것은 아주 불편한 문제였다. 어쩌면 전공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음은 다행이기도 하다. 손가락이 현을 튕기다 보면 굳은살이 생기기 마련이다. 친구들의 훈장 같은 굳은살은 내겐 얼마나 부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그사이의 손가락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니 대중음악을 연주하면 좋겠다. '

클래식을 하는 사람에게 대중음악에 맞는다고 하는 말. 그것이 정확한 진단이라고 믿어지는 선생님의 말씀이었기에 내심 화가 나고 그렇게 서운했다.


아름다운 악기 나의 Salvi.

연주를 그만두고도 가져다 놓을 곳이 없어 엄마의 집에 두었던 악기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집정리를 하며 영영 이별하게 됐다. 많은 사연과 세월을 간직한 반려악기는 관리 없이 방치한 지 오래되어 쓸 수 없는 악기가 되었다. 지금은 어딘가에서 공간을 위한 데코레이션이 되고 있을 것이다. 가져가시는 분이 그렇게 말했다. 무척 서운했지만 버려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위안을 삼고 있다.


반려악기와 인연의 시작이 내 뜻은 아니었다. 수학선생님이 되고 싶던 나에게 악기는 초록 잎이 빨간 색이 되어도 어색함이 없는 단풍잎처럼 물 들듯 자연스럽게 일부가 되었다. 운명처럼 사랑하게 된 우리의 처음에 대해 궁금할 것도 이유에 대해서도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엄마는 무엇을 바랐을까?

딸에게 선율에 걸맞는 아름다운 꽃 길만 펼쳐지기를 바랐을까?

처분하지 못했던 것은 엄마마음에 들어있는 미련이기도 했다. 자갈 돌밭을 골라 걸어 다니는 딸의 길 끝에 꽃길이 펼쳐질 거라는 놓지 못하는 희망.

딸인 내겐 엄마의 희망을 이루어주지 못함이 괴로워 가졌던 두려움이었던 그 희망.

아름다운 소리를 내던 살비는 우리 모녀에게 행복이기도 고통이기도 했다.


예전에 읽은 <구의 증명>에서 나온 글귀가 내게 위안이 되었다.

나는 죽은 자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란다.

엄마가 내게 물려준 희고 부드러운 살성만 기억하면 좋겠다.


살아서 몰랐던 건 죽어서도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죽은 뒤에 모른다고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뿐.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게 된다.

- 구의 증명. 최진영 -

서운한 대중음악 연주마저도 못하게 된 지금은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고 현을 부드럽게 도로로롱 긁으며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연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리워한다.

가을은 핸드크림과 함께 쓸쓸한 그리움을 몰고 온다.


바삭거리는 가을엔 촉촉한 보습이 필요하다.

손 닫는 곳마다 핸드크림


독서일기. <구의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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