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맛
봄동이 무엇이길래..
봄동은 순 한글이다. 그리고 발음은 [봄똥] 이라고 해야 제맛이 난다. 엄마는 "겨울(冬)을 뚫고 나온 봄"이라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없으나 아주 시적이고, 그럴듯한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속이 꽉 찬 가을배추로 김장을 하고, 저장해 두었다가 국도 끓이고 전을 부쳐 먹으며 맛난 겨울을 지낸다. 훈훈한 바람에 봄이 실려오면 무엇을 해도 맛있던 가을배추에 흥미를 잃어간다. 그즈음에 봄동이 나오기 시작한다. 왠지 자라다 만 것처럼 설기설기 제 멋대로인 잎 사이에 흙을 잔뜩 묻히고서..
냉이나 민들레 같은 봄나물과 마찬가지로 추위를 피하려는 듯 흙에 바짝 붙어서 자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봄동이 쌓여있는 마트 매대에서 아무리 뒤지고 골라봐야 어차피 모두 흙투성이다.
봄나물을 식재료로 고르는 걸 주저하게도 만들고, 너무나 먹고 싶게 만드는 것도 바로 흙내음이다.
덥석 집어온 봄채소는 다듬기와 씻기의 멀미를 경험하게 되지만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요즘 대세인 봄동 비빔밥 때문에 마트에서 한 번쯤 망설이다 돌아섰을 것이다.
봄의 맛은 흙맛과 함께 찾아드니 흙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봄채소 음식의 관건은 언제나 씻는 일인데 팁이라면 물에 두어 번 살랑살랑 흔들어 헹궈 큰 흙들을 떨궈내고, 다시 맑은 물에 30분쯤 담가두었다가 잎을 떼내며 한 장씩 흐르는 물에 씻으면 흙과 이물질이 잘 떨어지니 조금 수월하다. 그리고 벌레나 알이 숨어있는 건 잎채소의 뒷면이므로 뒷면을 아주 꼼꼼히 씻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주물러 채소가 물러지면 자칫하다가 잡초맛이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예전에 임금님이 상추나 생 채소를 쌈으로 먹을 때 뒤집어서 뒷면에 싸 먹었다고 한다. 뒷면에 뭔가 남아있을지도 몰라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준비한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하는 배려심으로 그리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가 있다. (과연 임금님은 입을 크게 벌리고 쌈을 먹었을까?)
생으로 먹는 채소를 씻는 일이 어렵게 생각되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다. 찬물에 오래 손을 담글 용기를 내라는 말 밖에.
혹시 이 글에서 봄동 비빔밥의 레시피를 찾는다면 안타깝게도 원래 그런 건 없다.
아마 강호동에게 밥을 비벼줬다는 할머니에게 요리법을 묻는다면 역시 무척 당황하실 것 같다.
간이 될만한 간장이나 액젓 쪼끔, 고춧가루 쪼끔 그리고 고소한 참기름 한 바퀴와 깨를 술술 뿌려 순식간에 대충 버무리고 그 위에 찬밥 한 덩이를 넣어 비비면 끝이다. 그것이 전부다. 밥을 비비다가 간이 싱거우면 간장이든 액젓이든 고추장이든 넣으면 된다.
아, 중요한 것은 봄동을 칼로 자르는 것보다는 손으로 북북 제 멋대로 뜯는 것이 포인트다.
레시피를 고민하지 말고, 깨끗이 씻기만 하면 봄동 비빔밥은 완성된다. 봄동 비빔밥의 맛은 봄동이 다 하는 거니까 말이다.
봄 채소들은 특유의 향긋함과 달콤함을 가지고 있다. 씹을 때 퍼지는 그 향기를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 마늘을 넣지 않고, 간도 간장으로 연하게 하는 것을 추천한다.
주인공인 봄동에게 잠깐 실례를 구하고, 혹시 어린 열무 비빔밥을 먹어보았는가?
깨끗이 씻은 -단순한 이 말이 언제나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야리야리한 어린 열무를 밥에 듬뿍 넣고,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 한 바퀴 휘익 두른 후 비비면 꿀맛이다. 된장찌개 속 두부 한 조각과 국물 한술을 첨가할 수 있다면 좋지만 아니어도 충분하다.
어린 열무 비빔밥을 내가 처음 먹어 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살이 중이었다. 친한 동생네가 작은 텃밭을 일구었는데 농사를 짓는 시댁에서 보내온 열무씨앗을 심었다. 싹이 난 후 열무가 잘 자라도록 속아 내는 날.
"언니, 점심 먹으러 와요."
밥상에서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와 마주한 열무김치가 아닌 생 열무가 가득 든 대접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열무를 생으로 먹어도 되는 건가? 까칠 거릴 것 같은데..'
"이거 결혼하고, 시댁에서 처음 먹어 봤는데 난 이게 시댁음식 중 제일 맛있더라."
서울 토박이였던 동생이 그렇게 말하곤 된장찌개 한 술과 고추장 한술을 넣고 썩썩 비비는 시범을 보였다. 그대로 따라한 후 한 숟갈을 입에 넣는 순간. 세상에 이런 맛이!
귀국 후 감동의 맛을 구현하고 싶었지만 생각과 달리 어린 열무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트에선 열무는 김치를 담글 수 있게 아주 잘 자란 열무만 팔았다. 여린 열무를 찾아 삼만리 했지만 집 근처 마트를 주로 이용하는 나에겐 찾기 어려운 식재료였다.
열무를 속아내는 날에 먹는다는 갓 뽑은 어린 열무 비빔밥은 무척 그리운 음식이다.
다시 봄동 이야기로 돌아와 봄채소는 봄에 먹어야 하고, 흙내가 살포시 나야 제맛이다.
최근은 거의 모든 식재료가 제철이 없지만 그래도 본디의 제철에 먹는 채소는 영양가도 풍부하고, 달큼하고 맛있다.
착한 봄동의 시대가 열렸다. 봄동은 외래종이 아닌 우리나라 K-채소다.
새로운 것이 아니고, 매 해 봄마다 먹던 봄동이 가치를 인정받으니 얼마나 기쁜지..
내가 아는 봄동은 반듯하게 정리된 깔끔한 마트에서 파는 식재료도 아니었다. 그전에 시장에서 흙 묻은 채 파는 봄동을 살라치면 천 원어치에 그만 주라고 할 정도로 커다란 봉투에 주인장 마음대로 한가득을 담아주었다. 봄동을 든 묵직한 손만큼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깨끗한 투명 비닐봉지에 포장된 두 세 포기의 봄동이 4000 원 정도를 하니 싼 식재료였는데 비싸졌다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정신이 든다.
한 입에 6-7000 원을 호가하는 몸값 탓에 맛도 못 본 두쫀쿠의 시대가 지나갔다. 이다음에 시간이 흐르면 그런 게 있었나 할 것 같다. 잘 모르지만 두쫀쿠 관련 주식이 올랐다고도 하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제철 봄동은.. 원래 맛있다.
늘 그자리에 있던 봄동이 어쩌다가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얼떨떨하다. 그러나 값비싼 디저트의 뒤를 이어 새 주인공이 된 흙내 나는 소박한 봄동의 열풍이 참 반갑다. 누군가의 주식에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나는 정성으로 봄동을 키워내는 농부가 올해도 내년 봄에도 매해 봄마다 웃음이 절로 나와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디 농부뿐이랴. 커다란 봄동 두어 포기면 식탁이 푸짐하고 온 가족이 배부른 행복으로 빵빵해진다. 이건 뭐 5000원도 안 되는 착한 가격에 누리는 완전한 행복이니 조금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바람이 있다면
다음 봄을 기약하며 초봄의 맛이 지나간 후 초여름 어린 열무 비빔밥이 뒤를 잇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고소한 봄동의 뒤를 상큼한 열무 그리고 다음은 구수한 배추가 그 뒤를 이어가며 음식과 함께 우리의 한 해가 그렇게 간다.
행복과 기쁨이라는 감정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를 것 같지 않다. 한 수저의 소박한 것으로 부터 향기롭게 온몸으로 퍼지는 것.
누구든 느낄 수 있는 같은 양의 행복이 아닐까?
봄동이 영원한 셀럽이기를..
행복하고 싶은 오늘
봄동, 어떠신가요?
오랜만에 맛집 글을 쓰며 이전글이 무엇이었나 보았다.
계획된 건 아니었는데 이전 글이 겨울의 맛. 꼬막이었다. (그동안 이슬만 먹고 산 척.)
설마 맛집 글을 계절에 한 편씩 쓰는 건 아니겠지?
봄동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