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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랭크 Mar 08. 2022

이야기 속으로 길을 잃는 공간, LCDC SEOUL

복합문화공간 LCDC SEOUL

  2021년 12월, 성수는 다시 한 번 술렁였다. 8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캉골의 히스토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하며 입지를 다진 패션 브랜드 SJ그룹이 처음으로 만든 복합문화공간 때문이다. 4층 규모, 500평짜리 플래그십 스토어 LCDC 서울에는 12월 한 달 동안에만 3만 2천명이 찾았다. 인파로 북적이는 골목에서 살짝 비껴난 외곽 골목을 걷다 보면 어슴푸레해진 하늘 아래 조용하게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 LCDC의 심볼이 된 회색건물 위 네온사인을 만날 수 있다. 크고 작은 공장들 사이로 하루가 멀다하고 트렌디한 공간들이 들어서는 성수이지만 이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바로 LCDC를 보기 위해서 성수동 중에서도 구석진 이곳으로 오는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클릭 한 번으로 수많은 브랜드와 브랜드 사이를 쉽게 오가며 탐색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왜 사람들은 굳이 문 밖으로 나와 이 구석진 곳으로 발길을 향했을까? 



보여주기와 보여주지 않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창


  거친 질감의 회색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곽 형태의 건물들이 레고 블록처럼 쌓여 있는 곳에 당도한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창문 속 풍경이다. 벽처럼 막힌 회색 콘크리트 건물의 내부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 사이 세모 모양으로 파진 틈을 가득 채운 창문으로 1층과 2층의 일부가 보인다. 마치 쇼케이스처럼 전시된 공간의 조각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LCDC는 SJ그룹이 새롭게 런칭한 패션브랜드 르콩트드콩트 ‘Le Conte Des Contes’의 약자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이탈리아 시인 Giambattista Basile가 낸 동명의 이야기 책에서 착안했다. 각각의 단편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책이 만들어지듯 각기 다른 스토리를 가진 브랜드가 모여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공간으로 기획됐다. 르콩트드콩트 로고에 그려진 토끼는 이야기의 안내자를 뜻하기도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처럼 건물 사이로 살짝 숨겨진 입구로 들어서면 먼저 뻥 뚫린 공터와 이를 둘러싼 세 개의 건물을 만나게 된다. 막 이야기의 세계에 발을 들인 당신은 어디부터 가야할 지 고개를 갸우뚱할 지도 모른다. 원래 자동차 공업사로 쓰였던 건물과 부지에 만들어진 LCDC서울은 A, B, C, 총 세 개의 동이 각기 다른 높이로 어깨를 맞대고 있으며 각 층별로 다른 브랜드들이 들어와 각각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층층이 쌓이고 겹쳐진 공간과 입체적인 이야기의 세계

 

  이 공간에 LCDC가 둥지를 틀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7개월여에 걸친 브랜딩 회의 끝에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컨셉을 도출해낸 후 운명처럼 지금의 공간을 소개받게 된 것이다. 부지의 넓은 마당은 상상에 새로운 전환을 주었다. 새로운 건물을 한 동 지어 외부 공간과는 단절시키는 담처럼 만들고 이를 기존 건물 두 동과 연결하면서 마당을 중정으로 바꾸었다. 천장을 뒤덮고 있던 천막을 걷어내니 건물의 벽을 액자 삼아 푸른 하늘이 담겼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만들어내는 틈의 공간은 LCDC에 독특한 인상을 만들어내며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쌓이도록 한다. 자동차 정비소의 시절의 이야기는 지나갔지만 그 틈으로 새롭게 들어온 이야기가 구석진 성수의 골목에 불을 밝힌다. 


카페 이페메라
카페 이페메라


  공간의 변화는 이야기의 전환을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다. 나도 모르게 책장이 넘어가는 흥미진진한 동화책처럼 LCDC의 공간은 이음새가 느껴지지 않을만큼 매끈하게 페이지를 넘기도록 한다. 넓은 창으로 빛이 쏟아지는 따스한 분위기의 까페 Ephemera에서 조용하지만 소란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여행 관련 수집품 사이를 한가하게 헤매다 보면 거친 질감의 철판으로 만들어진 이질적인 무드의 계단을 만난다. 이 나선 모양의 계단을 따라가면 우리는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패션 편집샵 르콩트 드콩트
패션 편집샵 르콩트 드콩트


  연이어 당도한 회색의 공간에는 SJ그룹이 새롭게 런칭한 패션 브랜드 르콩트드콩트가 자리잡고 있다. 경계 없이 펼쳐지는 1,2층의 공간을 지나 3층에 도착하면 이번엔 좁은 복도를 맞이하게 된다. 8-90년대의 학교나 오래된 여관의 복도를 연상시키는 이 층의 이름은 Doors이다. 복도를 걸으며 양쪽으로 늘어선 방문을 열 때마다 새로운 브랜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오이뮤, 문구 브랜드 Yoanna, 편지가게 글월, 수제비누와 향 브랜드 한아조, 셀렉트마우어, 이예하(YIYEHA)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스몰브랜드 6곳과 1개의 팝업공간이 우리를 새로운 이야기로 유혹한다. 


브랜드 팝업 공간 도어스


곱하기의 공간, 공간과 브랜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은 이야기들의 힘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하나씩 켤 때마다 새로운 환상이 나타나듯 문을 열 때마다 나타나는 작고 완전한 세계는 일상의 지루함에서 달아날 수 있는 도피처이자 그 자체로 설레는 동화이다. 이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길을 잃어도 좋다. 여정의 곳곳에는 주의 깊게 공간을 탐구하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디테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LCDC서울의 브랜딩 총괄을 맡은 김재원 디렉터는 오르에르, 포인트오브뷰 등 작지만 단단한 세계를 구축한 다양한 브랜드와 이야기를 이미 만들어낸 바 있다. 그런 그가 이 이야기의 마을을 구상할 때 Doors층에는 무엇보다 스스로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브랜드를 우선순위로 고려했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만나면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있는 세계는 자가증식한다. 멋진 이미지를 보여주는 브랜드는 계속해서 바뀌지만 소비자의 기억 속에 이야기로 자리잡은 브랜드는 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브랜드 팝업 공간 도어스
바 포스트스크립트


  단순히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서 모두 구할 수 있는 시대에 고객은 이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지 조차 알지 못한 채로 우연한 발견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브랜드가 단순히 멋진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주목받기 어려운 시대에 LCDC는 아직 누군가가 열지 않았던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크고 작은 이야기로 쌓아 올린 한 권의 동화책 같은 공간은 새로운 이야기를 갈구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토끼를 따라온 우리들을 흥미로운 또 하나의 세계로 초대한다. 



글. 김지영 에디터/ 사진. the blank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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