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레온은 레온 왕국의 수도로서 중세부터 잘 보존된 여러 유서 깊은 교회와 성당, 스페인에서 가장 큰 규모의 로마네스크 초기 고딕 양식 건물과 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한 주교좌 대성당, 그리고 특산품인 돼지가 아닌 소고기로 만든 하몽인 세시나(Cecina de Leon) 등으로 유명하다. 이웃 도시 바야돌리드와 카스티야 이 레온 주의 중심 도시냐 둘러싼 라이벌 감정도 있다. 이름이 레온(Leon)이라서 문장(紋章)도 사자이다. 레온은 순례길에서 만나는 큰 도시 중의 하나라서 많은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숙박을 하거나, 아니면 아예 이틀 정도를 묵는 경향이 있다. 조선 과객 금삿갓은 오늘 여기서 묵을 수 없다. 여기서 묵자니 오늘 걸어온 거리가 너무 짧아서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이 도시에서 푹 쉬고 유적도 구경하면서 한 이틀 쉬고 싶은 마음인데, 동반자가 휴대폰 액정 파손으로 하루라도 빨리 일정을 끝내고 바르셀로나나 미드리드로 가서 휴대폰 액정을 수리해야 한다니 어쩔 수 없다. 터덜터덜 힘든 발걸음을 옮기는데 발길에 밟히는 도로의 맨홀들이 눈에 들어왔다.
맨홀(Manhole) 글자 그대로 사람 구멍이다. 지하에 있는 시설물을 점검하거나 수리할 때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고 평소에는 뚜껑을 덮어 놓은 곳이다. 그런데 맨홀 뚜껑의 문양이 이탈리아의 패션회사인 펜디(Fendi)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문양은 명품회사들이 상표권이나 저작권으로 보호를 할터인데, 이곳 레온에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맨홀 뚜껑의 문양으로 쓰이다니. 방송사에 다니면서 저작권이나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익히 아는 조선 과객의 입장에서 당연히 그 문양의 쓰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의 맨홀 뚜껑의 종류가 무수하게 많고 모양이 대부분 사각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서울에는 그렇게 많은 종류의 맨홀 뚜껑을 볼 수 없었는데 여기는 정말 숫자도 많고 종류도 다양했다. 그런데 한 결같이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다. 원형은 거의 눈을 씻고 찾아보았지만 겨우 하나를 발견했다.
맨홀 뚜껑을 왜 원형으로 만들까? 이 질문이 과거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M/S Soft)의 입사 시험의 면접 문제로 나온 적이 있었다. 당황한 수험생들이 이런저런 답변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확한 답변은 뚜껑이 맨홀로 절대로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각형이나 삼각형으로 만들었을 경우 뚜껑을 대각선으로 하여 넣으면 맨홀에 들어간다. 그래서 실수로 뚜껑이 맨홀에 빠지면 작업자가 부상을 입거나 시설물이 파손될 수 있는 것이다. 원형은 어떤 사선을 긋더라도 모두 원의 지름을 초과하지 않으므로 맨홀에 뚜껑이 빠지는 일은 절대 없다. 아무튼 유서 깊은 도시 레온을 지나가면서 이곳의 맨홀 관리 실태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더구나 유명 패션 회사의 로고와 똑같은 문양의 맨홀 뚜껑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문양의 디자인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레온이 중세의 오래된 도시이고, 도시의 시설물 관리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까 펜디의 문양이 뒤질까? 아니면 펜디도 1925년에 설립되어 100년을 바라보니 펜디가 빠를까? 순례길에 지친 조선 과객의 쓸데없는 잡생각의 한 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