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라고 시작하는 문정희 시인의 <치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내들은 평생 은밀한 그곳의 비밀이 궁금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모천(母川)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이다. 이번에는 그 비밀을 확 벗겨 버리는 비엔나 출신의 아일랜드 예술가 고트프리트 헬른바인(Gottfried Helnwein)의 작품을 보면서 애로서(曖露書)를 논해보자. 표지 그림은 그의 작품 <LULU>의 일부를 잘라서 눕혀 놓은 모양이다. 헬른바인이 그러하듯이 금삿갓도 일부러 잘라서 변형해 보았다. 예술이란 장르가 탄생한 이래 여성의 누드는 남성의 눈요기와 쾌락을 만족시켜 주고 성장 발전해 온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은 남성의 성에 대한 지배와 도구화의 욕구가 예술과 자본의 교묘한 결합으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작품은 아래에 있고 이것을 조금씩 관점이 다른 각도에서 잘라 본 것을 같이 첨부하였다.
<LULU>
불란서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주장처럼 ‘옷이 하품’하는 곳이 아니라도 사내들의 인식 또는 무의식의 심연에 비밀의 화원에 대한 동경은 살아있으리라. 그래서 그곳이 궁금하여 보고 싶고,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이다. 르네상스 이래 화가들이 무수하게 그린 여인 중에 누드가 훨씬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헬른바인은 여기서 반전을 꽤 한 것이다. 타인이 눈치 못 차리게 또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감성으로 그곳을 보고 싶은 욕망이 대부분 일 텐데,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고 공격적으로 드러내서 잘 살펴보라는 구도로 관객을 엿 먹인다. 문정희의 상상력과도 배치되게 치마를 활짝 걷어 올리고, 팬티는 과감하게 끌어내린 자세로 남성의 코앞으로 다가서는 행위라니. 여기서 이러면 문정희가 얘기한 사라질 달, 뜨거운 회오리, 은밀한 흥망의 비밀, 감춘 바다와 갯벌, 꿈꾸는 조개, 영원한 허무의 동굴은 한꺼번에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애로서(曖露書) 조차 사그라들어버렸다.
<LULU의 일부 확대>
헬른바인은 그림, 사진, 설치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하지만 그의 주제는 늘 국가사회주의와 핍박받는 어린이에 모아질 때가 많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파격적인 장르를 활용하는 면도 있다. 그의 전시회는 가끔 군중들의 시위가 일어나고 전시가 불가능할 경우도 있었다. 아래의 작품은 시리즈 연작으로 <The 120 Days of Sodom>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돔의 최후가 적나라하게 일어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피범벅이 된 나체의 남녀들이 서로 엉켜서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 아니면 광란의 파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굴 표정으로 보아 광란의 파티가 지나쳐서 아귀다툼으로 변한 것 같기도 하다. 말세의 징조다. 마지막 그림은 독수리 머리를 가진 검은색의 나체 사내들이 광란의 파티를 하던 여인들의 팔을 잡아서 끌고 있다. 독수리 머리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분간이 안 된다. 나체의 여인도 끌려가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이 정도면 치마 속의 신비함은 이미 물 건너갔다. 문정희의 시에 대시(對詩) <팬티>를 쓴 시인 임보의 표현에 따르면 치마 속은 이미 참배객이 끊기고 닫힌 적막한 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