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애로서(曖露書)는 르네상스 시대의 뒤끝이 작렬하는 거장의 불멸의 명화 한 구석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이 워낙 대작이고, 불세출의 명화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례가 되겠지만 그림이 아닌 그의 짓궂은 뒤끝만은 훔쳐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다. 필자 금삿갓이 공연히 그를 폄훼해서 뒤끝이 작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사례와 역사적 사료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요, 건축가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쓴 <가장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선 뒤끝 작렬의 아래 그림을 보자.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최후의 심판> 작품인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우측 제일 아래가 바로 그곳이다. 그곳은 지옥이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어둡고 우중충하다.
그곳을 확대한 그림이 오늘의 포인트이다. 이 <최후의 심판> 그림은 위쪽이 천당, 중간이 인간세계와 연옥, 아래쪽이 지옥을 나타낸다. 제일 우측 아래의 당나귀 귀를 가지고 온몸이 뱀에게 휘감긴 사나이가 무리들을 노려보고 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뱀이 날카로운 이빨로 그의 성기를 덥석 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지옥에서 심판을 담당하는 미노스(Minos)이다. 당나귀 귀에 대한 설화는 다양하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탐욕스러운 황금의 왕인 미다스(Midas) 왕이 당나귀 귀를 가졌다. 우리나라는 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이 당나귀만큼 큰 귀를 가졌다. 서양은 이발사가, 우리는 모자 장인이 임금의 귀에 대한 비밀을 밝히게 된다. 임금이 당나귀 귀를 가졌다면 민심을 잘 들으라는 뜻이 되지만, 여기서 당나귀 귀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화가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이렇게 영원히 그림에서 지옥에 떨어뜨렸으니까.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중 가장 오랜 기간 활약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스스로 조작가로 남기를 바랐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에 따라 붓을 들고 서른 중반의 4년간을 처절하게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렸다. 그리고 환갑 나이에 교황 클레멘스(Clemens) 7세가 죽기 직전에 그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제대화(祭臺畵) <최후의 심판>을 그리도록 지시했다. 미켈란젤로의 마음은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의 장기인 조각에 몰두하여 걸작을 남기고 싶었을 텐데, 클레멘스의 명령으로 어쩔 수없이 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명령한 교황이 죽자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가 했더니 후임 교황 바오로(Paulus) 3세의 명령으로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고심 끝에 작업하는 그림은 온통 벌거벗은 나체화였다. 그것도 등장인물이 한 두 명도 아니고 대거 391명이나 되는 대작이 모두 나체화이고, 이 그림이 신성한 성당 제대(祭臺)의 벽화로 그려지고 있었다.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이나 심지어 예수 그리스토마저도 남성을 드러낸 채 알몸이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신곡>을 모티브로 천국과 연옥, 지옥을 연상하는 5개 부문의 인간 군상을 나체로 그린 것이다. 그러니 요즘 말로 로마 시내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다. 그중 당시 교황청의 의전 담당 추기경인 비아지오 다 체세나(Biagio da Cesena)가 가장 강력하고 줄기차게 미켈란젤로를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신성한 장소에 이렇게 부끄럽게 몸을 드러낸 알몸의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그림은 대중목욕탕이나 선술집에 더 잘 어울린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시스티나 성당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미켈란젤로로부터 낙인이 찍혀 만인의 웃음거리로 남게 된 것이다. 더구나 위의 그림 부분이 관람객의 눈높이에 가까워서 더 잘 관찰되니까. 성직자들의 등쌀에 본인의 얼굴도 아래 그림처럼 가죽을 벗긴 모양으로 그린다.
추기경 체세나는 교황 4명을 거치면서 계속 의전 담당을 맡아서 매우 독선적이며 탐욕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자기의 치부가 인터넷에 적나라하게 공개되니 혹평을 했던 미켈란젤로에게 말도 못 부치고, 어쩔 도리가 없어서 교황에게 그림을 수정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교항 바오로 3세도 미켈란젤로에게 말을 못 하고 “추기경님, 교황의 관할권은 천국과 연옥까지이고, 지옥은 관할 밖이라 제가 어쩔 수가 없고 예수님만이 구해줄 수 있어요.”라는 답변을 들려주었단다. 교황도 자기 얼굴이 어떻게 그려질지 노심초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켈란젤로는 391명의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그가 만난 당시의 인물들로 구성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가 평가하는 데로 표현을 한 것이다. 교황도 수도복을 입은 모습으로 예수 주변에 몰려 있는 사람들의 다리 틈새에서 겨우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미켈란젤로 자신은 예수의 발 옆쪽에서 벗겨진 사람의 가죽을 들고 있는 사람 즉 사도 바돌로메(Bartholomew)의 얼굴로 표현했다. 아무튼 이 수많은 나체 그림은 논란이 많았지만 미켈란젤로에게 수정을 요구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세월을 보내다가 1563년 트리엔트(Trient) 공의회에서 개신교와의 대항을 위해서 각종 성화(聖畵)에서 성기가 드러나는 것을 금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성기가 드러난 모든 작품에 무화과 잎이나 천으로 그곳을 가리게 되는 Fig Leaf Campaign이 유럽을 뒤흔들었다.
위의 작품은 1548년에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Cardinal Alessandro Farnese)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제작했던 마르첼로 베누스티(Marcello Venusti)가 그린 미켈란젤로의 원작 그림을 모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덧칠하기 전의 모양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아무튼 미켈란젤로가 거의 사경(死境)이 가까워져도 작품을 수정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1564년 2월에 미켈란젤로가 사망하자 제자들이 그의 장례식을 치른 후, 비오 4세 교황의 의뢰로 다니엘라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가 스승의 작품에 덧칠을 하여 천이나 나뭇잎으로 주요 부분을 가리게 되었다. 심지어 부서진 수레바퀴를 들고 있는 성녀(聖女) 카타리나(Catherine)와 그녀의 뒤쪽에 있는 성인 블레이세(Blaise)가 배후위(後背位)의 자세로 그녀에게 밀착하는 듯이 보이는데, 이 부분이 음란한 마음으로 보면 매우 음란하여 폼페이의 목욕탕 벽화로 그려진 그림들과 비슷한 구도이다. 그래서 카테리나는 옷을 입히고, 둘이 서로 바라보는 머리를 파내고 다시 그려서 예수 쪽을 바라보도록 고쳤다. 이 일로 볼테라는 “Il Braghettone(바지를 만드는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의 구조는 미켈란젤로의 아래의 스케치를 참고하면 된다.
그림보다는 조각을 더 장기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그에게 그리기도 힘들고 어려운 엄청난 크기의 대작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계속 주문한 교황들이 밉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교황들이 미사를 집전하는 제단의 바로 뒤쪽에 지옥의 동굴 입구를 배치하였다. 지금 제대에서 신도들을 향해 헛소리를 하면 돌아서면 바로 지옥의 임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이런 어려운 그림의 주문도 아마 얄미운 건축가 브라만테(Bramante)의 공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브라만테는 당시 회화에 약한 미켈란젤로가 거작 프레스코화에서 보기 좋게 실패하는 것을 보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남긴 글에서 브라만테를 많이 씹었다. 하지만 이런 질투의 끝에 불세출의 걸작이 나온 것이다. 뒤끝은 작렬하는 성격이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원동력이 되어 그는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성당의 성화에서 다음과 같은 적나라한 나체를 최초로 도입하여 그린 천재이고, 이들을 "이그누디(Ignudi)"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