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닮다 Aug 27. 2022

17. 너 아니면 누가 나를 데려가겠니


 나는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돈을 벌어 착실히 모아둔 것도 아니었다. 새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 돈을 풀어대는 일이 많았고 여윳돈이 있을 때에는 친구들과 술을 먹는 것으로 이십 대 초반을 보냈다. 

 나의 가족들은 변변한 취미라는 게 없었다. 먹고살기도 빠듯한 마당에 취미를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린 내가 보고 배울 단 하나만이라도 가르쳐 줬더라면,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하루에도 수차례 마주하는 낯선 이들의 방문, 집안에 차려진 신당, 있지만 없는 것과 같은 엄마, 일이 없는 날이면 술로 하루를 보내는 아빠, 막내 삼촌의 주사, 나에겐 그 시절의 모든 것들이 암울했다. 

 물론 그 힘든 시기에 잠시 술로 지새운 날들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영겁의 기억으로 남을 그때의 모습들. 나는 그것을 나의 무기이자 방패로 삼기로 했다. 술기운으로 상처받기 전에 먼저 찌르고, 술기운으로 상처받은 순간들을 다 잊을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핑계다, 그래 다 핑계야. 


 나의 이십 대는 참 별 볼일 없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친구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 운전면허 한 번 따 볼 생각조차 안 해보았고 쉬는 날 맞춰 놀러 가자던 친구들의 여행 제안도 거절했다. 이십 대의 생기발랄함은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가을쯤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이십 대가 되어보니 술집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것과 당당하게 담배를 살 수 있다는 것, 부모님 동의 없이 어디든 취직을 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다를 바가 없었다. 삶의 큰 전환점이 되어줄 줄 알았던 스무 살이 사실 참 별 거 없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 술, 술이 나에겐 가장 재미있었다. 술을 먹는 순간은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애틋해 마지않는 할머니도 생각나지 않았고 가슴 터지게 울고 싶었던 자퇴하던 순간도 잊을 수 있었고, 나를 당신의 딸로 인정하지 않는 새엄마도 잊을 수 있었다. 나 하나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 그게 어떤 이야기든 술기운에 하는 말이 될 수 있던 자리. 나는 아마 내 생각보다 더 일찍 술에 중독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거리던 때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 

 제대를 4개월 앞둔 상병 말 군인, 친구 S와 내 남편은 초등학교 동창이고 S와 나는 중학교 친구였다. 당시 상병 말이었던 남편이 자유시간을 보내던 중 싸지방(군대 내 PC방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에서 S의 미니홈피에 들어갔다가 나와 찍은 사진을 보고 나를 소개해 달라고 했단다. 본인 피셜은 그렇다는데 S의 말로는 내가 너무 마음을 못 잡는 것 같아 자기 친구들 중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줘야겠다, 생각하고 소개해준 게 내 남편이었단다. (이미 10년도 더 지난 일이니 누구 말이 거짓이든 묻어두자..)

 남편을 만나기 전 나의 연애는 시궁창이었다. 연애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썸'에 더 가까웠던 나의 연애사는 늘 나의 호기심으로 시작되었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자격지심에 엎어져 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먼저 호감을 드러내 놓고 정작 상대가 내게 호감을 표시하면 '나를 왜?' 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 도망가 버리기 일쑤였고 어찌어찌 연애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나의 집착과 불안에 질겁을 하고 상대가 도망가버리곤 했다. 정상적인 연애가 없었다. 

 그런 나를 단 한 번도 불안하게 만든 적이 없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 

 술만 먹으면 주저앉아 꺼이꺼이 우는 나를 감당해 주었고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다고 알려준 것도 지금의 내 남편이다. 물론 싸우기도 했었고, 헤어질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연인일 땐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결혼 후엔 이혼이고, 서류상에도 그 사람의 흔적이 남는다. 우리도 흔적을 남긴 채 남이 될 뻔한 적이 꽤 많았다. 그리고 그건 애석하게도 나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겨우 스물네 살, 가진 것도 없이 한 결혼에 가족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남편의 친구들에게도 많은 비웃음을 샀던 우리였다. 돈이 없어 식도 올리지 못한 채 아이부터 덜컥 낳고 시작한 결혼생활은 내가 꿈꾸던 결혼생활과 너무도 달랐다. 매일이 '로맨스'일 줄 알았던 이 결혼이 '액션', '다큐멘터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동갑내기 부부가 친구처럼 사는 것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동갑내기인 우리는 결혼을 하면서부터 꽤 여러 해 동안 기싸움을 했다. 나이 서열이 없으니 이 가정의 주도권을 잡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리려고 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했다.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없으니 냉랭한 분위기도 오랫동안 지속이 되었다. 

 우리가 언제 열렬하게 사랑했을까. 사랑했던 사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지쳐가고 있었고 그 무렵 나는 다시 술을 찾았다. 몇 년간 먹지 않았던 술을 빈 시간만큼 채워 넣으려는 듯 무지막지하게 쏟아붓고 있었다. 술을 먹지 않는 내 남편과 술을 찾던 나, 싸움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 되었다. 

 처음 몇 번은 그러려니 넘어가 주었지만 술을 먹는 빈도 수가 잦아지고 간격이 점점 짧아지자 남편은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술을 먹는 날은 대게 주체하지 못한 채 취해있었으니 심각성은커녕 4살이 된 큰 아이를 케어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술을 찾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술을 먹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대사처럼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와 같이 술을 먹는 이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취하도록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기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래, 말 그대로 변명이다. 

 현실과 환상에 괴리감을 이기지 못해서? 밑바닥부터 시작하게 된 결혼 생활이 불행해서?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어려워서? 자기변명이고, 핑계이며, 나는 가장 무책임한 방법으로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결혼 생활 내내 술을 먹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의 음주 패턴은 매일 먹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것이라고 했다. 반년 정도는 술을 먹지 않다가 한 번 먹기 시작하면 3-4일을 내리 먹고, 그리고 또 몇 개월 먹지 않다가 다시 3-4일을 연달아 먹고, 이런 식의 음주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남편은 내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다고 했다. 

 술을 먹을 때면 현실감이 사라졌다. 없던 용기가 생겼고 다소 위축되어있던 자존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물론 술이 깨고 나면 터져버릴 풍선이었지만 그때만큼은 헬륨가스라도 불어넣은 듯 하늘 위로 둥둥 떠다녔다. 자신감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내 모습에 어떤 존재로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구쳤다. 위험했다. 

 그러다 문득 남편과 연애하던 때가 떠오르면 마치 옛날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은 듯 그때의 기억에 취해버렸다. 나와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마다 생선 뼈를 발라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던 모습, 카페 특유의 조용한 분위기를 싫어하면서도 나를 위해 애써 앉아있던 모습,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을 좋아했지만 내가 짜 온 스케줄에 맞춰 이동해주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날 위해 위장약까지 먹어가며 함께 해주던 모습이 너무 아득한 옛날이 되어버린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5년을 싸웠고 남편은 나에게 두 번,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그때는 '내가 이렇게 힘든데 그거 하나 이해 못 해주나' 싶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혼 서류를 두 번만 내밀었다는 게 고마울 지경이다. 아마 그때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오래전 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안정감과 행복을 나누지 못했겠지. 


 우리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게 된 건 애석하게도 시아버님의 상을 치르고 나서였다. 당시 겨우 쉰여섯의 연세로 너무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고 온 후로 우리는 삶이 너무도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예고 없이,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떠날 수도 있는 생. 없는 살림에 없다고 징징댄다고 더 나아지지 않을 형편, 비수 같은 말을 꽂아놓고 뽑아낸다고 사라지지도 않을 상처,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선택한 결혼이 서로에게 족쇄가 되는 것 같아 헤어진 들 어디로 날아갈까. 

 우린 예상치 못한 슬픔 앞에 서로의 욕심을 내려놓았다. 우리 조금 더 끌어안고 살자. 아이를 위해 마지못해 사는 우리 말고 우리가 행복한 삶을 아이에게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퇴근 후 남편은 집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던 나에게 "애들 보느라 수고했어."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고 그러면 나는 "응, 오늘도 밖에서 고생했네." 해주었다. 

 벌어도 벌어도 늘 돈 앞에서 나약했던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고 함께 새벽까지 배달 알바를 한 후, 쪽잠을 자고 출근했고 퇴근 후 잠깐이나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다시 새벽 알바 나가기를 2년 가까이 함께한 끝에 지긋지긋한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서로에게 지우려고 했던 짐을 나눠지고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무겁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반갑게도 나는 그 후로 술을 완전히 끊었다. 몇 달의 공백을 갖다 다시 들이붓는 것이 아니라 아예 완전히. 술이라면 치가 떨려하던 남편이 얼마 전 나에게 물었다. 


 "이젠 아예 술 생각도 안 나겠다?" 

 "응, 역하다 이제. 그만큼 먹어댔으면 내 몸뚱이도 이제 질리겠지."

 

 그러자 남편이 기가 막히다는 건지, 내 말이 웃긴 건지 피식 웃었다. 


 "고오맙다, 안 먹어줘서."


 ... 얼마나 질렸을까. 참 가지가지 여러 가지 하는 여자를 만난 너도 무슨 고생이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진지하게 속삭였다. 


 "너 아니면 누가 나를 데려갔겠니. 너라서 참아줬고 너라서 잘 다독여준 거지. 고마워, 이렇게 힘든 여자 참아줘서." 


 내 말이 굉장히 뜻밖이었는지 남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네가 나 만나서 고생 많았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 만나서 마음고생 많이 했지.." 


 이곳에 모두 열거할 수 없는 우리의 사연. 

 짧다면 짧은 12년의 사연 모두를 내가 먹은 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내가 모두 덮고 가겠다'는 허울 좋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12년에 담긴 수많은 사연들 중 남편에게 가장 미안한 일로 남아있고 앞으로도 쭉 지켜야 할 약속이기에 여기에 기록한 것일 뿐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복잡한 나를 사랑해주어서 늘 고맙다고, 나의 노력 덕분에 행복할 수 있다며 모든 공을 나에게로 돌리는 남편에게 나는 다시 한번 우스갯소리로 포장하여 수줍게 마음을 건네어 본다. 


 "너 아니면 누가 나를 데려갔겠니." 







이전 07화 16. 담배 피우는 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