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며, 무속인 가족을 둔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이니 부디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기억하고 있는 모든 유년 속엔 작은 꽹과리 소리가 늘 함께하고 있다. 새벽 5시, 청숫물(정화수)을 떠다 신당에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할머니의 고달픈 하루가 흘러간다. 무당년 팔자라는 게 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이런 민간신앙이 존재했었는지, 그들이 역사적 배경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에 관해 중학교 때 배웠던 기억이 얼핏 남아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들으려 하지 않았고, 믿지도 않는다. 나는 무당의 손녀다. 내가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는 믿지도 않는 영역의 일을 '거스를 수 없는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이건 나의 확대해석이 아니라 내가 무당의 손녀라는 것을 아는 모든 이들의 질문이었고, 그들이 내놓은 나의 미래였다.
할머니의 하루는 새벽 2시부터 시작될 때도 있었고, 큰 굿판이 잡힐 때면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굿판을 겅중겅중 뛰어다닐 때도 많았다.
학교에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현관문 앞에 걸터앉아 평소 냄새도 못 맡는 담배를 연달아 줄 개비로 피우고 계시는 할머니를 마주할 때도 있었고 낮은 대문과 담벼락 사이에 주택 2층 높이만 한 새 대나무를 꽂는 날이면 어김없이 골목 어귀에서부터 울리던 꽹과리, 징, 북소리. 그 소리에 뚝방 위에서 우리 집 안을 빤히 쳐다보던 구경꾼들과 그런 구경꾼들의 수많은 눈을 비집고 집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들으라는 듯 "쯧쯧, 딸내미인가 봐." 하던 그 수군거림. 교복을 입고 익숙하게 들어선 집, 무당의 팔자라는 게 그랬고 무당의 손녀라는 게 그랬다.
인생 가장 절실할 때 찾아와 모르는 이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고해성사의 장이 되지만 거기서 한 발짝만 물러서도 마치 당신들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듯 모두가 구경하며 조롱하는 곳. 신당이란 곳이, 굿판이라는 곳이 그런 곳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어딜 가도 '무당'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무당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매서운 눈매, 앙다문 입술, 늘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 비해 화려한 차림새. 우리 할머니는 전형적인 무당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라서 얼핏 보기엔 그냥 동네 할머니 같다. 평범한 차림새에 평범한 인상, 아니 오히려 사람 좋아 보이고 선한 눈매를 가진 인상이라 그 누구도 '무당'일 거라고 짐작하지 않는다. 이 동네에서만 30년 넘게 살았으니 동네 사람들이야 '산신 동자 집' 또는 '보살님'이라고 부르지만 동네 밖을 벗어나면 그냥 '누구 엄마', '미주 할머니'다.
그렇게나 평범한 인상을 가진 나의 할머니가 '무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이며 내 나이로는 제법 일찍이었다. 내게 독하게도 못되게 굴었던 두 번째 새엄마가 쫓겨난 후, 당장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할머니의 굿판에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북과 징, 꽹과리 소리에 혼이 쏙 빠지고, 화려한 한복을 입고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신장 칼을 휘두르며 겅중겅중 뛰기도 했고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무당들이 무서웠다. 그중 가장 무서웠던 건 나의 할머니가 굿판을 뛰어다닐 때의 눈빛이었다. 다른 무당들이야 본 적 없는 사람들이니 그런 눈빛을 한대도 그러려니, 하지만 나의 할머니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매서운 눈빛,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호통, 이 굿판을 연 '손님'의 등에 소금과 쌀 등을 뿌려대며 통곡하는 모습. 나를 대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다른 세상에서 겪는 신비하고 무서운 경험,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다 점차 그 모습이 익숙해지고 귀가 찢어지는 타악기의 소음에도 적응이 되어갈수록 나는 굿판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무당이 흰 무명천을 양손에 쥐고 굿판을 뛰어다닐 때면 나도 두루마리 휴지를 길게 뜯어 양손에 쥐고 거울 앞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흉내 냈고 집안에 있는 작은 징을 두드리며 박수무당처럼 빠르게 무언가를 읊조리기도 했다. 내가 따라다녔던 굿판에는 보통 박수무당(남자 무당)들이 징과 꽹과리, 북을 두드리며 춤추는 무당이 하는 말에 호응을 해주거나 무당이 읊는 사연을 따라 읊었다. 흥을 돋우기 위해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무당이 소위 조상에게 빙의가 되어 무어라 호통을 치면 마치 자신이 그 조상신의 자손이라도 되는 듯 "예, 예. 이 못난 자손들 잘 되게 해 주십시오." 라거나 "죄송합니다~" 하곤 했다.
어느 날, 내가 그들을 그리고 당신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을 본 할머니는 기겁을 하며 내 손에 들린 휴지 조각을 빼앗아 들고 내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보는 대로 배우던 7살, 할머니는 내게 "무당년 손녀라는 소리도 속이 썩는데 왜 무당년 흉내까지 내느냐"며 나를 붙들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 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에 예민하고 불편한 열일곱 즈음이 되자 신수를 보거나 굿판을 열기 위해 우리 집 거실에 들어와 있는 낯선 사람들이 너무 불편하고 불결하게까지 느껴졌다. 아직도 저런 미신에 목숨을 걸다니, 나보다도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어른들의 초조한 얼굴을 보며 '나는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묘한 우월감까지 느껴졌다.
신수를 보러 왔다가 대성통곡을 하며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고, 신점을 보고 나오며 '어우, 소름 끼친다' 고 중얼거리며 팔을 문질 거리고 나가는 사람, 굿을 해도 당신들이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온 가족들이 쫓아와 따지는 경우도 있었다.
새벽 2시를 넘긴 시간에 집으로 전화해 남편의 폭력이 서럽다며 신세한탄을 하는 사람, 며느리의 구박이 서럽다며 꼬박 1년 동안 새벽 5시부터 보살집으로 쫓아온 할머니, 복비가 없다며 자기 집 앞마당에 달린 개두릅을 따온 사람, 복비 만원을 놓고 사돈의 팔촌 사주까지 다 물어보고 가는 사람, 아이의 수능 몇 달 전부터 매일 같이 집으로 찾아와 치성을 드리고 수능을 보고 결과가 나오는 날까지 하루 한 번, 한 시간씩 전화기를 붙잡고 기도를 해달라는 사람. 정말 별의별 사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넘쳐났다.
특히나 복채도 없이 꼬박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새벽 5시에 우리 집으로 쫓아와 피신 아닌 피신을 하던 할머니로 인해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당시 20대 초반,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까지 모두가 불편을 겪어야 했는데 나중엔 그 집 아들이 우리 할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를 홀려 가출시키고 감금까지 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 당신의 말만 들어줄 줄 알았던 보살이 다른 손님을 받고, 자신을 귀찮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자 매일 어딜 갔다 오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할머니.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나서서 해명을 할 때마다 '무당년 손녀'라고 비아냥댔던 그 아들에게 나 또한 "당신 마누라 간수나 잘해. 지 마누라가 지 엄마 괴롭히는 것도 몰랐던 주제에 이제 와서 생각하는 척은!!" 하며 참지 못한 적도 있었다. 내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그렇게 대응하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불같은 성미의 자식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나만 알고 있던 이 일은 다행히도 정식으로 '사건'이 되기 전에 오해를 풀었지만 그 뒤로 할머니는 종종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고 했다.
"무당년 팔자가 그래. 식구들이 손가락질받는 거 알면서도 참아야 되고, 남이 가진 사연을 풀면 속풀이 할 수 있도록 들어줘야 하고 속상하면 속상 한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뛰어야 마음이라도 조금 편하게, 안심할 수 있게 해 주지. 저 할미도 오죽하니 그랬겠냐만은 무당년이라 이런 취급까지 받아야 되나 싶고.. 무당년 손녀란 소리 듣게 해서 너한테도 미안하고. 새끼들 알면 속상할까 봐 이런 일 겪고도 쉬쉬해야 하고.."
말 끝을 흐리고 자리에 누운 할머니는 한동안 현관문 밖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무당의 팔자가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무당이 아닌 것이 그 심정을 모르는 가장 큰 이유이며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영역이기에 모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이별이지만 그것이 순리이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그들의 영역은 '죽음/이별' 과는 매우 다르며, 순리를 역행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이와의 대화, 보이지 않는 사주팔자, 신을 데려오는 굿판, 우리가 생각하는 순리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이니까.
나는 여전히 할머니가 하는 비과학적인 일을 믿지 않지만, 겪어보지 않은 그들의 삶을 함부로 비하하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주고, 염원을 대신 빌어주며, 간절함을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라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당신께서 말씀하신 '무당년 팔자'는 곁에서 보기에도 참 기구하지만 세상엔 기구한 팔자들이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