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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May 17. 2022

15. 혼잣말하는 여자

우울에 둘러싸이고 불안이 쌓이고.

 이제 안녕을 고했으니, 지금부터 서술할 이야기들은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들이다.

 내겐 아주 어릴 때 생겨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버릇이 하나 있는데, 혼자 있을 땐 항상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곤 한다. 90년대 중반 즈음 방영하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당시에 가장 주목받는 신인, 혹은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 셀프카메라로 자신의 일상을 찍거나 자막으로 질문이 깔리면 대답을 하는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대개 진행자와 마주 앉아 진행자가 질문을 하면 출연자가 대답하는 방식의 토크쇼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출연자 혼자 대답하고 일상을 보여주는 모습이 내겐 아주 신선했다. 언뜻 보면 미친 사람같이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 프로그램이 내가 혼잣말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상상 속의 나는 연예인이 되어 시청자들에게 유명연예인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연예인이란 직업은 일상을 공유하는 친근한 느낌보다 아주 신비로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물며 여자 연예인들은 이슬만 먹고살 것 같고, 똥도 싸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같은 인간일 뿐임에도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신비로움, 그런데 그런 틀을 깨고 연예인들의 평범한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꽤 신선했다. 물론 말이 평범한 일상이지, 설정이 왜 안 들어가 있겠냐마는 그때는 ‘저렇게 화려하고 예쁜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사는구나.’라는 시선을 갖게 했다.

 또래의 형제가 없다는 것은, 그래서 어른들 틈에서 지낸다는 것은 꽤 심심하고 무료하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데 함께 궁금해해 줄 친구보다 그 궁금증에 대답해 줄 어른들만 넘쳐나고, 같이 소꿉놀이를 해주고 인형 옷을 갈아입혀 줄 친구나 형제가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쓸쓸하고 외로워서 누군가 내게 질문을 던져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와중에 자막으로 깔리는 질문에 꼭 누군가 진짜 질문을 한 듯 혼자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새로운 놀잇감을 발견한 듯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유명한 아역배우이고, 그런 나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물론 때에 따라서 상상 속 상황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교동 집에 살 때는 학교로 가는 길 중간에서 친구를 만나기 직전까지, 할머니 댁에서 살 때는 가족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출근을 하는 길에도 나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했다. 나를 스치는 수많은 사람이 날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지만, 눈치가 빤한 성격이니 사람들과 거리가 가까워질 때면 중얼거리던 입을 뚝 멈추고 조용히 걸었다.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버릇이라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알게 될 법도 한데, 혼자 있을 때만 나오는 버릇이다 보니 이런 내 버릇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버릇은 결혼하고 나서도 지속되다가 아이들을 낳은 후 몇 년간 사라졌었다. 혼자 있을 틈이 없었고 혼자 있다 한들 외롭다고 느낄만한 환경이 아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 버릇이 다시 찾아온 건 작년 초부터다.

 황당한 건 이 버릇이 다시 찾아온 것을 정작 나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온 후 어린이집 하원 차량 시간이 바뀌면서 퇴근 시간과 하원 차량 시간을 맞춰도 큰아이가 집에 먼저 도착하는 경우가 있어 거실에 홈 카메라를 달아 두었었다.

 작년엔 내가 일을 쉬고 있을 때였고, 우울증과 불안 증세로 힘들어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새 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큰아이에 대한 걱정에 개학이 다가올수록 내 심리적 압박감과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3월, 개학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나는 조용한 집에서 책을 읽거나 운동을 나가거나 혼자 있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우울과 불안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과 며칠에 지나지 않는다. 우울과 불안에게 꾸준히 하지 못할 운동 등의 취미는 작심삼일의 개념이 아니라 우울을 스스로 이겨내 보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하지만 단 며칠 만에 이렇게 무던히 애를 써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그야말로 ‘현타’가 오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것은 삶의 가치에서부터 출발한다. 당장 나의 경제적 생활이 풍요롭던, 척박하던 과 관계없이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잠이 들기 직전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단 1%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딱히 무엇 때문이다, 라고 꼬집어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때려 부수고도 싶었다. 동시에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했고 그러면서도 아무도 나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는 날엔 외롭고 고독했다.

 아이들을 등교시켜놓고 잠깐만 쉬었다가 청소해야지, 하고 앉아있던 오전의 시간은 내가 우울함에 잠식되었던 동안 큰아이가 하교하는 시간까지 빠르게 달려가 있었다. 또 어느 날은 이불 속에서 눈을 내미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물에 푹 젖어 수면 깊숙이로 잠겨 드는 것만 같아 종일 잠만 자기도 했고 이유도 없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다가 다시 집으로 올라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내리 2~3시간을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이유는 없었다. 나는 나를 집어삼킨 우울과 함께 삶의 가치를 잃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 이유가 없었듯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도 이유가 없었다. 세상이 온통 무채색인 날들.

 무채색의 시간 중 어느 날부터 나는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날은 이상했다고 했다. 내 상태가 걱정되어 일하는 동안에도 홈 카메라를 수시로 켜두던 내 남편은 부엌에 서서 설거지하는 날 보고 놀랐다고 했다. 열흘이 넘도록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있거나 소파에 앉아 울고만 있던 나 대신 집안일은 퇴근하고 온 남편의 몫이었다. 그날도 그런 날들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거실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조금만 틀면 보이는 주방 싱크대 앞에 내가 서 있었다고 했다. 마침 설거지를 모두 끝낸 것인지 싱크대를 등지고 돌아서 소파 쪽으로 다가오는 내 입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을 본 내 남편이 홈 카메라 ‘소리 듣기’를 눌러보았고 나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듯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중얼거린 말들은 별로 특별한 내용이 아니었다.

 “이렇게 쌓인 설거지를 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아요. 사실은 움직이고 싶지 않은 날이 많지만요. 그래도 오늘은 집 꼴이 너무 엉망이라 안 할 수가 없어서 오랜만에 부지런히 좀 움직여봤어요.”

 남편은 내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지, 이어폰을 꽂고 있는 건지, 집 안에 누가 있는 건지 여러 번 확인해보았다고 했다. 카메라를 보며 내게 카톡을 보내보기도 했고 카메라를 사방으로 돌려보기도 했는데 나는 누구와도 통화를 하지도, 누군가 우리 집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편은 그런 내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고 했다. 그날 저녁 아이들이 모두 잠든 후, 남편은 심각한 얼굴로 혼자 중얼거리는 내 모습을 녹화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런 내 버릇을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한동안 사라졌던, 아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날부터 시작됐을 나의 오랜 버릇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에 더 놀라웠다.

 그렇다면 내가 이 글을 쓰며 첫머리에 썼던 ‘아이들을 낳고 사라진’ 나의 버릇은 사실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우울에 둘러싸인 것인지, 내 마음에 불안이 쌓인 것인지, 도대체 눈에 보이지 않는 이것들이 언제 나를 놓아줄지 시기를 알 수 없었다.

 우울은 내가 ‘이겨내 보자, 그렇게 하자!’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에게 이것들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울증, 즉 마음의 병이라는 건 전적으로 본인 의지에만 달린 것이고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은 마음이 참 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겪고 나니 우울증만큼 마음이 그토록 바빠지는 병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상상 속의 친구를 불러내기도 하고, 과거를 증오하고 원망하다 현재와 타협하지 못하는 지경에 다다르고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를 암흑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미래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었으니까. 내가 죽고 나면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을 미래를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참 신기하게도 내가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깨닫게 된 뒤로 그것을 나의 우울을 달랠 위안으로 삼기 시작했다. 나는 의사나 심리상담사는 아니지만 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버티게 할만한 방법이 필요했다.

 아이들은 집에 들어옴과 동시에 나의 기분을 살폈고 남편은 점점 지쳐가다 이내 포기하는 것 같았다. 큰아이의 학교 상담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고민은 무서운 속도로 뿌리를 내려 마음 깊숙이 내려앉아 있던 나의 유년까지 뻗어 들어갔고 착실하게 불안의 거름을 뿌려주며 ‘눈치 보는’, ‘주눅 들어있는’, ‘돌발적인’ 등 나를 쏙 빼닮은 아이의 단점들이 가지가지마다 피어나기 시작했다. 푸릇하고 예쁜 아이의 모습도 잎사귀마다 적혀있었지만 한 번 눈에 띈 단점의 이파리들은 내 시야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 채 바로 코앞에서 팔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온통 ‘뿌리부터 뽑아 치워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더는 내 치부를 아이의 모습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애써 감추고 모른 척 해왔던 나의 치부를 들키는 것이었을까, 나의 단점을 빼닮은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런 나를 알면서도 아이를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나의 오판을 인정하기 싫어서였을까. 이유야 무엇이 되었던 나는 게으르고 어리석은 엄마였다. 이 몇 글자를 인정하는 데 9년이 걸렸다. 큰아이를 낳아 키우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9년, 그것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한 지는 꼬박 1년 만이었다.

      

 나는 그 후로 혼자 있는 시간 동안 혼잣말을 하며 나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혼잣말로 설명해가며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다시 한번 되뇄고 간혹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을 때는 내가 자주 하는 행동 중 좋지 않은 습관들과 좋은 행동들을 구분해서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듣는 이는 없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렸고, 듣는 이가 없으니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남에게 보이기 싫었던 나의 단점, 고쳐야 할 것들도 가감 없이 이야기하며 상기할 수 있었다. 그중 과거를 계속해서 곱씹는 것이 내게 가장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모두 훌훌 털어버리기로 했다. 내가 지금 이 글들을 쓰는 이유가 된.

 물론 이 글을 읽는, 혹은 나의 습관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이상해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방법이 누군가의 눈에 좋게 보이진 않으리란 걸 알고 있지만, 그 이상한 방법이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끔 했고, 좋지 않은 감정들을 눌러 담아 우울에 둘러싸이고 불안이 쌓여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놓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고 아이는 내 생각보다 더 차분하게 나의 가르침을 잘 따라주고 있다. 물론 이 안정이 얼마나 유지될는지 알 수 없고 아이도, 나도 또 언제 어떻게 흔들릴지 알 순 없지만 이젠 조금 더 유연하고 의연한 자세로 우울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적당한 우울이 주는 센치한 감정을 나만의 방법으로 넘길 의연함도 생겼고, 불안이 가져다줄 적정량의 걱정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전보다 조금 더 현명하게 풀어나갈 유연함도 생겼다.

 사람 일이라는 건 알 수가 없어서 내가 다시 좋지 않은 감정에 잠식되지 않으리란 장담 또한 할 수 없지만 내겐 방법 한 가지가 생긴 셈이다. 조금 더 살다 보면 적당한 해결책이 또 나타나겠지.

 계획이란 걸 세울 수 없는 감정의 변화는 직접 대면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해결 방법 또한 겪어보지 않는 이상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겨우 한 가지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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