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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Feb 22. 2022

13. 인간은 인간에게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새엄마는 내게 무섭도록 잔인했다. 물론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내겐 그 누구보다 잔인했다. 이제와 아빠의 편을 들 수도 없는 것이 아빠 또한 그런 새엄마의 행동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도 우리 아빠는 그것이 그녀가 내게 가하는 학대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는 늘 그랬다. 


 내가 직장을 구하고 백만 원이 넘는 월급을 처음 받았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상의 한 마디 없이 고모가 부어준 적금 통장을 깨고 난 후, 나는 고모네 가게로 출근을 할 수가 없었고 남은 돈마저 생모에게 다 주고 난 뒤 나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돈을 준 것이 아깝진 않았다. 그러나 이십 년 만에 본 내게 고작 가져갈 것이, 할 말이 돈 얘기뿐이었다는 것이 나를 무척이나 우울하게 만들었다. 

'아, 나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구나. 친척들이 얘기했던 대로 그때 죽는 게 나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으로 온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우울한 생각들로 꽉 채워진 내게 그나마 위로가 됐던 건 친구 종민이었다. 당시 슬기는 대학에 다니는 중이었고, 신입생이었기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처럼 대학에 가지 않은 친구, 못 갔던 안 갔던 나를 만나줄 수 있는 친구는 종민이 뿐이었다. 고모네 가게에서 나와 두 달 동안 매일 저녁마다 종민이를 만났다. 우리가 하는 것이라곤 남대천 체육공원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캔을 까놓고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겐 아주 큰 위로가 되었다. 이제 성인이 되어 당당하게 술집에 갈 수도 있는 나이이건만, 우리는 그렇게 그 벤치를 좋아했다. 날이 추우나 더우나 그 벤치에서 맥주 한 캔만으로. 


 스물한 살이 되던 해 5월, 나는 취직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백만 원이 넘는 월급을 받아보았다. 하루 12시간, 월급은 밥값을 포함해 120만 원이었다. 첫 월급을 타고 나는 막내 삼촌에게 적금형 보험을 들었다. 정확한 명칭이 적금형 보험인지 가물가물한데 어쨌든 나는 매달 70만 원씩 적금을 부었다. 그리고 나머지 50만 원은 밥값, 혹은 유흥비였다. 고모네 가게에 다닐 때 매달 드렸던 할머니의 생활비는 그날부터 드리지 않았고, 그저 내 유흥비로 모두 탕진했다. 그래 봐야 고작 50만 원이었고 그중 점심값을 빼고 나면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것이 내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술 마시며 노는 것, 고작 나는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1년 정도 일을 하다가 다른 직장으로 옮겼을 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년 전이다. 당시만 해도 재직증명서만 있으면 신용등급이고 뭐고 없이 카드를 막 만들어주던 때였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두 살이었고 신용등급이 뭔지도 모르던 나이였다. 내가 처음 카드를 만든 이유는 새엄마 때문이었다. 직장을 옮기며 월급이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새엄마가 내게 대뜸 전화를 걸었다. 


 "미주야, 집에 냉장고가 고장 나서 냉장고를 사야 되는데 당장 목돈이 없어. 다달이 갚을 테니까 네 이름으로 신용카드 좀 만들어주면 안 될까?"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만 전화를 해 나긋한 목소리로 전화하는 새엄마에게 서운했지만 나는 그래도 좋았다. 늘 내게 무언가 부탁을 하기 전, 내게 밥은 먹었느냐 아픈 곳은 없느냐 묻는 그녀의 안부인사가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걱정이 되어서 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것마저 좋았다. 무엇에 그렇게 굶주려 그것이 가식인 줄 알면서도, 내게 무언가를 부탁하려 할 때에만 그런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을까. 

 나는 새엄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골손님이자 롯데카드 영업사원이었던 손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두 번째 직장은 당시 엄청난 붐을 일으켰던 등산복 브랜드였고 그곳엔 가지각색의 손님들이 넘쳐났다. 거품 잔뜩 낀 가격에도 아랑곳없이 바지 한 장에 이십만 원이 넘어도 척척 사가던 사람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도 아니건만 패딩 한 장에 80-90만 원을 호가해도 현금다발을 안기며 사가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선생님, 저 블랙야크 직원인데요. 네, 네. 그 카운터에 있는.. 네. 저 카드 한 장 만들 수 있을까요?"


 나는 그 길로 롯데카드를 한 장 만들어 새엄마에게 건넸다. 그게 내 불행의 씨앗의 단초였다. 처음 100만 원 짜리였던 한도는 몇 개월 쓰지도 않았건만 성실하게 완납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물두 살짜리에게 700만 원의 한도를 안겼다. 내 월급이 겨우 150만 원인데 카드 한도가 700만 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한도였지만 어렸던 그땐 그게 자랑거리였다.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은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쓰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백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 즐기는데 나는 백만 원이 훨씬 넘는 월급에 신용카드까지. 철이 없던 나는 친구들에게 꽤나 거들먹거리고 싶어 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롯데카드 한도가 700만 원짜리면 뭐하겠는가.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카드였는데. 그래서 나는 현대카드를 한 장 더 만들었다. 내가 쓰기 위해서. 롯데카드를 제외한 나머지 카드들은 한도가 100만 원이었지만 내 월급의 액수와는 관계가 없이 신용카드는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내가 현대카드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카드는 아빠가 가져갔고, 결국 나는 다시 신한카드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스물두 살짜리, 월급 150만 원을 받는 사회초년생에게 총 천만 원어치의 신용카드가 만들어진 셈이다. 


 아빠가 내 카드를  받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사우디아라비아로 일을 하러 가게 되었을 때, 그래서 그 카드를 새엄마에게 맡기고 갔던 그때부터 총 한도 800만 원어치의 내 카드가 그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빠가 없는 동안 나는 그녀의 사생활에 터치하지 않았다. 당시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와의 연애 때문이기도 했고, 아빠가 없는 동안 그녀가 자유롭길 바라서였다. 

 생모가 아빠 친구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아빠의 행동이 무척이나 다르게 보였다. 새엄마가 어쩌다 회식을 하는 날이면 저녁 9시가 넘자마자 새엄마에게 득달같이 전화해 화를 내던 모습을 보며 나는 아빠가 의처증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빠가 없을 때면 내게 신세를 한탄하듯 "아빠가 너무 구속하고 집착한다"는 새엄마의 말에 아빠의 의처증에 대한 내 의심은 점점 확신이 되었다. 내가 그녀의 편에 선다면, 그래서 그녀가 내 말로 인해 조금 더 편해질 수 있다면 나를 더 좋아해 주겠지. 나는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이십 대 초반을 보냈다. 

 아빠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그녀는 내게 단 한 번도 전화를 하지도, 찾아오지도 않았다. 내가 전화를 하거나 "오늘 연곡 들어갈게"라고 하면 질색을 하며 힘드니까 오지 말라고 하곤 했다. 나는 그때 단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했다. 


 "너도 일하고서 피곤한데 집에 들어가서 쉬고 너 쉴 때나 와."


 나는 그 말이 정말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어리석었고, 단 한순간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빠가 매달 오만에서 보내오는 돈은 대략 700만 원 남짓이었다. 오래전, 온갖 대출을 끌어다 양계장 사업을 하려다 사기를 당하고 빚더미에 앉았던 아빠와 그녀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나는 지금이라도 그 돈으로 모든 빚을 갚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빠는 1년의 타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개월 뒤, 다시 베트남 하롱베이로 떠났다. 그때가 내 나이 스물네 살이 되던 해 5월이었다. 

 아빠가 오만에서 귀국해 잠시 한국에 머물던 때, 나는 그녀의 딸 그러니까 내 동생에게서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하나 들었다. 대학을 다니던 그 애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왜, 어디서부터 끓어오르는지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그토록 가고 싶던 대학이었다. 물론 나 또한 가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라도 갈 수 있는 대학이었지만 빚에 허덕이는 내 부모를 보며 그 나이에 학자금 대출이라는 명목 좋은 빚을 끌어안고 싶지 않아서 대학에 가지 않았던 것인데 너는 그 대학을 가놓고 이제와 대학도 자퇴를 하고 아이를 낳겠다고? 

 엉뚱한 곳에서 터져버린 나의 분노는 내 동생이 아닌 새엄마에게로 향했다. 동생의 임신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리지 않았고, 심지어 아빠에게조차 비밀로 했던 그녀였다. 물론 꺼내기 어려운 얘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린 가족이 아니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에게로 향한 내 분노는 그동안 사정없이 구겨져있던 나의 자존감과 함께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말이 좋아 분노이지, 쌍욕에 가까웠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럼 그동안 내가 갚아준 그 애의 빚과 그 애의 학자금의 일부까지 전부 무엇이 되느냐고 악다구니를 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의붓딸이긴 하나 10년을 넘게 살아온 딸에게 욕지거리를 듣는 것이 황당하고 괘씸했을 것이라는 걸 안다. 허울 좋은 핑계 삼아 내가 참아왔던 모든 것을 터트려버린 마당에 그녀와 나는 이제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참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동생은 모르고 있을, 나의 10대를 그렇게 무참히 짓밟아놓고 내 자존감을 바닥까지 헤집어놓고 이제와 나는 없는 사람 취급이라니 "네가 뭔데 걔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 니. 그녀의 대한 내 분노는 극에 달했지만 정작 이 소식을 들은 아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 같은 나의 한풀이가 끝나고 다시 우리 집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대학을 자퇴하고서라도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하겠다는 내 동생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고, 결국 내 동생은 대학을 자퇴했다. 그 애가 자퇴서를 냄과 동시에 그동안 내가 갚았던 얼마의 학자금과 기숙사비, 그와 함께 나의 작은 노고도 공중분해되었다. 

 그 해 봄, 아빠가 베트남으로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나 또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한 해에 두 번이나 날아들었고 베트남에 있는 아빠에게, 그리고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아빠와 그녀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숨을 내쉬는 아빠와 달리 '너도 별 수 없구나.'와 같은 반응을 보이던 새엄마. 그렇게 나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때의 남자 친구(현재의 남편)와 혼인신고를 올리고 살게 되었다. 

 내 남편과 내가 따로 살림을 내게 되었을 때, 베트남에서 전화를 한 아빠는  "엄마한테 말해놨으니까 가서 냉장고랑 다른 필요한 가전제품 있으면 하나 사." 라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내가 살림을 내기 전, 이미 내 동생의 살림집에 가전제품을 사줬던 내 카드로. 물론 아빠가 낼 카드값이었지만 가전매장에 따라온 그녀는 어쩐지 마뜩잖아하는 기색이었다. 

 양문형 냉장고 앞에 서서 서성거리는 나에게 "방도 두 칸 밖에 없다면서 주제에 무슨 양문 냉장고야. 너는 아빠가 힘들게 벌어온 돈 그렇게 쓰고 싶니?" 라며 톡 쏘아붙였고, 생선 그릴이 있는 가스레인지를 보고 있을 때에는 말도 하지 않고 나를 툭 치며 2구짜리 가스레인지를 가리키기도 했다. 결국 나는 내 살림 하나 선택해보지 못하고 그녀가 골라준 가전을 들였다. 


 그 해 11월, 당시 임신 8개월이던 내게 대뜸 전화를 해 "오늘 새벽부터 승희 진통한다는데 내가 지금 일을 하고 있어서 가 볼 수가 있어야지. 네가 좀 가볼래?" 하고 묻던 새엄마의 말에 그 애가 사는 지역 병원으로 가야 했고(왕복 6시간), 나는 거기서 꼬박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까지 진통만 하고 있는 동생의 곁에서 뭉치는 배를 부여잡으며 버티다 결국 그 애가 출산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녀는 두 달 뒤 내가 아이를 낳았던 그날,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아이가 돌이 되어갈 때까지 우리 집에도, 전화도 한 통 먼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쩌다 한 번씩 내가 연곡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는 날이면 부러질까 무섭다며 내 아이를 한 번 안아보지도 않았다. 고작 10만 원, 내 아이가 태어나던 그날 내 통장으로 돈을 보내준 게 다였고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내 아이에 대해 궁금해한 적도, 찾아와 본 적도 없었다. 


 2013년 7월, 내 아이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나 아빠가 귀국했던 그날 딱 한 번 아빠와 함께 우리 집에 다녀갔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해, 11월 내 동생의 아들 그러니까 내 조카의 돌잔치가 있던 날 내 남편에게 부탁을 해 왕복 여섯 시간 거리까지 함께 다녀왔던 그녀는 그날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아빠가 그동안 외국에서 벌었던 돈과 내 모든 카드들과 함께. 

 영문을 몰랐던 내가 실종신고를 내고 난 후, 아빠에게 득달같이 쫓아갔을 때 아빠는 울고 있었다. 이미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또 싸웠어?"


 나는 그저 단순히 부부싸움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내가 귀국했을 때부터 이상했어. 통장에 적어도 5-6천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통장에 700만 원뿐이야. 이 돈 다 어쨌냐고 물었더니 친정에 빌려줬대, 외삼촌한테. 그러려니 했지. 승희가 계단에서 넘어져서 발목이 부러졌다고 수술해야 한다길래 승희한테 전화하려 했더니 병원에 있어서 전화 못한다고 하지, 좀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통장 조회해보고 집에 오면서 화가 나서 전화를 했더니 끊으려던 걸 잘못 눌렀는지 전화를 받아놓고도 아무 말이 없더라고. 계속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데도 누구랑 대화를 하고 있는지 대답이 없더라고. 그래서 가만히 듣고 있으니 웬 남자랑 같이 있잖아."


 그리고 아빠는 나에게 핸드폰 녹음본을 들려주었다. 새엄마와 어떤 남자의 대화였다. 


 "나는 이제 준비됐어. 퇴근하기 전에 가자."


 새엄마의 말에 남자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새엄마가 다시 말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못 살아. 돈도 다 가지고 나왔고 더 이상 갈 데도 없어. 승희도 얘기하면 이해해줄 거야. 그러니까 같이 가자."


 계속해서 상대방 남자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끝끝내 어떠한 답이 없다가 "당신 나오면 전화할 테니 먼저 거기 가 있어." 라며 새엄마에게 말했다. 


 글로 모두 옮겨놓기엔 꽤 긴 대화 내용이었지만 그들의 대화 내용은 대략 그러했다. 아빠가 벌어온 돈 모두를 빼돌렸으니 나의 새엄마와 낯선 남자가 함께 도망을 가겠다는 그런 내용.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사람이 살며 하늘이 노래졌다, 는 뜻이 어떤 말인지 몰랐는데  그날 알았다. 정말 하늘이 노래지고 별이 보인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그녀는 그렇게 당신 딸의 생일날, 아빠가 벌어두었던 모든 돈을 들고 홀연히 사라졌다. 내게 카드 빚을 잔뜩 안겨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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