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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Jan 26. 2022

11. 오늘은 나의 스무번째 생일입니다.

1989년 1월 26일~





 고졸 검정고시를 본 직후,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나에게 고모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부터 포남동 카리스마 나이트 근방에서 닭발집을 운영하던 고모는 하릴없이 뒹구는 조카를 가만두지 않았다. 가족이긴 하지만 어쨌든 부모의 동의서가 있어야 아르바이트가 가능했으니 고모가 직접 아빠에게 물었고, 아빠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나는 고모네 가게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시간은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당시 최저임금이 30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월급으로 따지면 대략 40만 원이 될까 말까, 그런데 고모는 나에게 월 60만 원의 월급을 주었고 그중 20만 원은 내 이름으로 만든 통장으로 고모가 직접 적금을 부어주었다. 따지자면 내 수중으로 들어오는 돈은 40만 원 정도였다. 당시 열여덟짜리가 어디서 그만한 돈을 만져보겠는가. 그 돈도 감지덕지였다.

 고모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 나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물론 아빠에게 허락을 받긴 했으나 혹시 손님들이 나이를 물어도 절대 미성년자라고 말하지 말 것, 월급 중 10만 원은 꼭 할머니에게 생활비로 드릴 것, 무단결근 따윈 절대 봐주지 않는다는 것.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내가 일했던 2년 중 무단결근을 한 날은 셀 수도 없다. 특히나 월급을 받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무단결근이었다. 다시 연락이 되어 만나기 시작한 슬기와 슬기의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기도 했고 종민이와 초저녁부터 만나 맥주 한 캔을 두고 앉아 열심히 수다를 떨기도 했다. 끝나는 시간이 워낙 늦은 새벽이다 보니 친구들을 만날 수가 없었고, 딴에는 친구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한다며 꽤 으스대고 싶어서였다.

 

 고모네 가게에는 손님들이 늘 미어터졌다. 일찍 결혼을 하고 남매를 낳은 고모는 이 가게를 시작하기 전 보험회사에 다니며 고모부와 맞벌이를 했고 퇴근을 하고 나면 집에 앉아 무거리(오징어채)를 잘게 찢어 공장에 넘기는 부업까지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고모가 왜 그렇게 쉼 없이 악착같이 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겨우 중학교만 졸업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나의 고모는 무엇을 하든 억척스럽게, 그것도 아주 잘 해냈다. 그런 고모가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사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때가 더 많았다.

 돌려 말하지 못하는 직설적이며 지금 말로 뼈를 때리는 조언도 서슴지 않는 고모가 이런 장사를 한다는 게 사실 어울리진 않았다. 고모가 보험회사를 다닐 때야 내가 워낙 어렸고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내가 고모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고모가 손님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모두 보게 되지 않는가. 내가 아는 고모와는 정반대로 무척이나 상냥하고 친절했다. 늘 뼈를 때리다 못해 관절을 꺾어버리는 듯, 톡 쏘는 말투의 고모가 저런 표정, 저런 말투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기도 했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고 아이들을 키우며 고모가 왜 그렇게나 악착같이 살아왔는지, 고모의 생활터전만큼에선 왜 그렇게나 친절했는지 이해하지만 그땐 뭘 잘 모르는 열여덟이었다.

 우리 고모는 누가 봐도 참 예뻤다. 조막만 한 얼굴에 하얀 피부, 길고 큰 눈과 복스럽게 생긴 콧망울에 오뚝한 콧날. 남자 손님들이 들끓게 마련이었다. 뭘 어찌해보자 덤비는 남자 손님들은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우리 고모를 끈적한 시선으로 훑어대는 남자 손님들이 너무 싫었다. 자주 오는 단골 남자 손님들은 가끔씩 고모에게 같이 술 한잔 하자며 테이블에 앉길 권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일부러 더 크게 주방에 대고 "고모!! 2번에 소주 한 병!!" 하며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하며 장부에 바를 정(正) 자를 크게 체크했다. 어차피 내가 가져다줘야 하는 술인데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고모에게 일부러 얘길 하는 것이다. 내가 조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사람들은 더 이상 고모에게 추근거리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친조카인지 물어보는 사람이 허다했고, 그럴 때마다 난 "네!" 했다. 물어보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 그냥 아는, 나보다 연배가 있는 사람을 '이모'라고들 부르지, '고모'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어쩌면 고모는 나를 고용한 직후부터 장사를 하는데에 지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을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웃질 않았고, 손님이 불러도 대답 한 번 하지 않았다. 돈은 벌어야겠는데 우리 고모에게 추근대는 남자 손님들은 너무 싫고 일을 하긴 해야겠는데 그게 너무 귀찮기도 했다. 특히나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너무도 힘들어하던 시기라 더더욱 손님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단골손님들은 고모에게 아무리 친조카라도 알바 좀 바꾸면 안 되느냐며 숙덕거릴 때가 많았다. 알바 눈치가 보여 뭘 시킬 수가 없다는 손님들의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손님들에게 심통을 부렸다. 소주병도 쾅, 안주도 쾅! 애꿎은 심술이 손님들에게 향하는 것이다.

 어느 날, 고모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나에게 이야기했다.


 "손님들한테 좀 친절하게 해. 너 때문에 손님들이 눈치 보여하잖아."


 이미 손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네까짓게 뭔데 우리 고모한테 날 자르라 마라 하느냐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참다 참다 이야기를 꺼낸 고모에게 괜한 심술을 부렸다.


 "나는 고모가 이런 일 하는 게 싫어.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싫고, 그냥 다 싫어."


 누구에게 심통이 난 것을 고모와 애꿎은 손님들에게 풀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철이 없어서 나조차 스스로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니까. 그렇게 2년을 다녔다. 나 때문에 떨어져 나간 단골손님도 있었고, 그런 내게 직언을 한 손님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여기 사장 조카인데 네들이 어쩔 거냐는 식이었다. 고모는 끝끝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나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었다. 내가 고모였다면 조카고 나발이고 당장 잘라치웠을 일이건만, 고모는 2년씩이나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내 생일 전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새엄마였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얘기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생일에 먼저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내 생일 전날, 그것도 내가 고모네 가게로 출근을 하던 늦은 저녁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고모네 가는 길이니?"


 어쩐 일로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본인 딸에게도 워낙 무뚝뚝하고 거친 말씨를 썼었기에 이런 나긋한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출근하는 길이라는 나의 말에 어쩐 일로 내일 네 생일이지 않느냐며, 미리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려고 전화를 했다고 했다. 좀 어리둥절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엄마가 날 생각해주는구나, 싶었다. 그간 내 자존감을 갉아먹는 말들을 수도 없이 많이 했어도 엄마가 필요로 한 자리에 기꺼이 나서 주었던 엄마였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이미 모두 갉아먹혀버린 내 자존감은 아랑곳없이, 속없는 사람처럼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그녀가 고마워 눈물이 다 핑 돌았다. 저녁은 먹고 출근하느냐, 추운데 옷 따뜻하게 입고 가라 등등의 말을 한 그녀가 어쩐지 말끝을 흐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무 고마운 마음에 하얗게 내뿜어지는 겨울 숨과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 고모네 가게에 도착할 무렵, 아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도 내 생일을 축하해주려나보다, 나는 기쁘게 전화를 받았다.


 "어, 딸 미리 생일 축하해."


 내가 기억하는 어느 범위에서도 나에게 다정하게 '딸'이라고 불러준 적 없는 아빠마저 내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횡재야? 스무 살이 되는 게, 성인이 되는 게 좋긴 좋은 거구나. 온 가족이 나한테 축하를 전하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새엄마와 똑같이 밥은 먹었느냐,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묻던 아빠가 잠시 전화기 너머로 머뭇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작은 소리로 그녀가 "얼른."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싶었다.


 "미주야. 아빠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나보다 어른인 나의 부모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뭐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내가"뭔데?" 하고 다시 되물을 새도 없이 아빠가 말했다.


 "승희 대학 예치금을 넣어야 되는데.. 아니, 아니다. 얼른 출근해."


 그렇게 전화가 뚝 끊겼다.

 ... 아, 그래서였구나. 나한테 전화를 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슬금슬금 걸어 어느새 고모네 가게 뒤편에 도착했던 내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저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전화가 아니었다는 걸, 그래서 나에게 다들 상냥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머리가 쭈뼛하며 오한이 몰려왔다. 1월의 생일, 나는 내 생일이 그 맘 때인 것을 원망했다. 끝끝내 나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하고 내 생일이 1월인 것을 원망했다.

 그리고 내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그녀였다. 설움이 차올라 목 울대가 너무 울렁거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미주야, 승희 대학 예치금을 이달 말까지 넣어야 되는데 돈이 좀 모자라. 나중에 아빠 월급 타면 줄테니까 70만 원만 좀 빌려줄 수 있지?"


 있을까, 도 아니고 있지? 였다. 열여덟부터 돈벌이를 한다는 것도 알고, 고모가 내 이름으로 된 적금을 붓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나의 부모. 예대에 가고 싶다는 나의 말엔 우리 형편에 예대가 얼마나 비싼데 거길 가겠다고 하느냐며 질겁을 하던 그녀가 나에게 지금 자기 딸 대학 예치금을 빌려달라 말한다. 1월 25일, 그리 춥지 않은 날씨였음에도 이가 다닥다닥 부딪혔다. 울분이었을까, 억울함이었을까, 서러움이었을까. 다닥다닥 부딪히는 치아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그 얘기하려고.. 생일 축하전화 한 거야..?"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언제는 생일 축하전화 안 했니?"


 응.. 단 한 번도 없었어. 동생이 알려줘서, 동생이 언니 생일이라고 연곡 들어와서 밥 먹자고 해서 그때 알게 된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내 생일이라고 전화한 적 없었잖아.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설움을 토해내고 싶었지만 나는 그것마저도 삼켰다.


 "아빠 월급날 갚을게. 이거 안 내면 입학취소된다잖아. 70만 원만 빌려줘, 응?"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났다. 내가 이 돈을 주면, 내가 그래서 동생에게 도움을 주면 전보다 나를 더 예뻐해 줄까? 나를 딸로서 인정해줄까? 내가 학교를 그만뒀던 일에 대해 이젠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정에 굶주린 아이였고 내 자존감을 모두 갉아버린 그녀일지라도 나는 그녀에게 딸로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 동갑이어도 나는 돈벌이를 하고 있으니까, 당신의 딸보다 내가 당신에게 앞으로 더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럼 그땐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나를 못난 딸로 취급하지는 않지 않을까.

 나는 그 길로 고모네 가게로 뛰어 들어가 고모에게 다짜고짜 적금 통장을 달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고모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왜, 이걸 지금 찾아. 너 나갈 때 줄 거야. 너 일 그만둘 때 줄게."

 "아니 그냥 지금 줘. 엄마가 승희 대학 예치금 필요하대."

 "그걸 네가 왜 줘, 이 등신아!"


 고모가 불같이 화를 내며 득달같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니 새끼 하나 대학 못 보내면서 걔 예치금을 미주가 번 돈으로 내겠다고?"


  그 뒤로 더 무어라무어라 욕지거리를 내뱉는 고모였지만 나는 온통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돈벌이를 하는 내가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탬을 준다면 날 전보다 더 예뻐해 줄 거야, 돈이야 내가 또 벌면 되지. 생일은 매년 돌아오고 돈은 내가 계속 벌면 되니까.

 나는.. 꼭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처럼 정이 그리워, 사랑받고 싶어서 고모에게서 적금 통장을 뺏어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모는 한동안 나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가게에도 출근하지 못했다.

 기어코 나는 다음날, 그러니까 내 생일날 총 520만 원이 든 적금 통장을 깼다.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첫 적금통장은 그렇게 깨졌고, 그중 100만 원은 엄마에게로 보내졌다. 나머지 420만 원은 할머니에게 맡기며 돈 없을 때 조금씩 꺼내 쓰시라며 맡겨두었었고 그로부터 3개월 뒤 나는 생애 처음 보게 된 나의 생모에게 남아있던 350만 원마저 모두 건네주었다.


 정이 너무 그리워서, 어떻게 해서든 엄마가 필요했던 나에게 그들은 그렇게 잔인했다. 심지어 나의 생모에게 나는 모성애를 매개체로 한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고, 내가 처음 100만 원을 건네던 그날 이후로 나의 새엄마에게 나는 칭찬 한 번과 사과 한 덩이로 재주를 넘는 곰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다루는 법을 아주 제대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나의 스무 살 생일을 서른 네살의 생일 날, 다시 떠올려본다.





다들 제 글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살았느냐 묻곤 합니다.

각자의 인생엔 모두 자신만의 서사가 담겨있고 모두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저 또한 남들과 다를바없이 나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고, 평범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만, 그것을 평범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입니다.


다들 '쟤보단 내가 낫구나' , '내가 더 불행해' 등으로 남과 나를 비교하길 즐깁니다. 저 또한 그렇구요. 이 글을 쓰기 전까진 그랬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더군요. 남과 비교하기엔 나의 서사와 당신의 서사가 너무도 다르단걸요. 평범하다고 다같은 서사일리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린 모두 특별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서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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